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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뮤지컬 ‘하데스타운’
  • 바람저널리스트 (김유승)
  • 승인 2022.03.1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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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S&CO 제작사 포스터

 

뮤지컬 하데스타운에는 관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는 구간이 있다. 바로 운명의 여신들이 부르는 “너는 또 출근해, 출근해, 출근해. 퇴근은 없어.” 라는 가사가 들릴 때다. 일요일 저녁에 들을 때 유난히 아프게 들리는 이 가사는,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들의 세상과 그에 얽힌 인간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뮤지컬이다. 예수를 배신한 죄인인 유다를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 이상주의자로 그려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처럼, 하데스타운은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현대의 관점으로 해석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극에 담아내고자 했다. 굶주린 탓에 자본가인 하데스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데스타운에 발을 들이게 된 에우리디케와 세상에 봄을 가져오고자 한 청년으로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구해 다시금 지상으로 데려오려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다. 대공황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과 재즈로 이뤄진 넘버들은 그를 뒷받침하는 요소다.

 

‘베푸는 자’들의 여유

그리스 신화에서 하데스는 지하세계의 왕이자 땅속 모든 광물의 주인이기에 부유한 자로 해석되곤 한다. 이는 하데스타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데스는 자신의 공간인 지하를 발전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철도를 깔고 공장을 세웠다. 극 초반, 무대에 마련된 장치인 높은 테라스에서 세련된 정장을 걸친 채로 신문을 보고 페르세포네와 체스를 두는 하데스의 모습에 그가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가 지하세계를 발전시키고자 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인 페르세포네 때문이다.

들판에서 햇살을 받으며 꽃을 꺾던 지상의 여인을 사랑해 아내로 맞게 된 그는 계절의 순환을 위해 페르세포네를 주기적으로 지상으로 돌려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지하세계의 여왕이 된 페르세포네는 여전히 지하세계를 싫어하기에 하데스는 지상으로 간 페르세포네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끝없는 의심에 시달리며 페르세포네를 향한 집착을 키웠다. 그의 집착 때문에 페르세포네가 정해진 것보다 짧은 기간을 지상에 체류하게 되자, 세상에는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혹독한 계절인 여름과 겨울만이 남게 됐다. 햇빛이 사라진 겨울만이 지상을 덮친 것이 아닌, 봄가을이 사라져 길어진 여름과 겨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게 됐다는 묘사는 기후위기가 닥친 현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세포네를 위해 하데스가 세운 지하의 공장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운명의 여신들은 그들의 영혼을 부숴 지하세계가 돌아간다고 묘사할 정도다. 머리가 잘리고 싶지 않다면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기계처럼 노래하며 움직이는 노동자들을 본 페르세포네는 이건 정말 정상이 아니라며 하데스가 만들어낸 지하세계의 풍경을 거부한다. 하데스는 지상처럼 지하를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자신의 욕망만을 투영해 페르세포네가 바라지 않는 것을 그녀에게 주고자 했다.

반면 페르세포네는 남편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 바랐다. 이들의 관계는 수평과는 거리가 멀다. 공장에서 피어나는 열기를 자신의 마음과도 같이 여겨달라며 페르세포네에게 구애한 하데스는 그녀에게 다시금 거부당하자 자신이 준비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워해줄 새 여왕을 찾겠다고 말한다. 이때도 페르세포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술과 약에 취하는 것뿐이다. 극 중에서 하데스가 진정으로 페르세포네를 사랑하고, 새 여왕을 찾겠다는 말이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에게 투정을 부린 것 뿐 만이라고 해도 그의 행동을 온당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서사에서는 익숙한 문법이 읽혀진다. 바로 고딕 소설의 그것이다. 아내의 자유를 제한하고 원하지 않는 부만을 들이밀며 자신을 구속하려고 하는 남편을 아내는 거부하나,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잘해주고 있다는 자신의 마음에 취한 남편은 아내가 바라는 것을 명확히 보지 못하고 그녀의 영혼이 말라 죽어가는 것을 방치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정에 머물며 집안을 돌보는 것일 뿐, 사회생활은 철저히 제한된다. 집 안에 구속당하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고자 한 운동이 1세대 페미니즘이라고도 불리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다. 베티 프리단은 저서 『여성의 신비』를 통해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우울감과 불안, 짜증을 겪게 된 여성들의 고충을 꼬집기도 했다. 이처럼 페르세포네를 통해 과거 ‘집안의 천사’라 불렸던 중산층 여성의 고통을 보여준 하데스타운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1세대 페미니즘은 인종 및 계층적 문제로 인해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해 부르주아 페미니즘, 혹은 백인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부유한 남편을 두었기에 노동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으나 노동자 가정의 여성들은 그들과 다른 현실에 처했다. 남성이 가장의 역할을 하는 백인 가정과 달리 흑인 가정의 경우에는 바깥에서 노동하는 여성 가장에 의해 생계가 유지되는 일이 빈번했다. 추운 겨울임에도 음악에 심취해있는 오르페우스를 부양하던 에우리디케에게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작중에서 페르세포네는 이야기한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즐기는 삶을 살면, 자신이 늘 잔을 채워줄 것이라고. 그 사이에 섞인 오르페우스는 꼬집어낸다. 그녀는 가난한 자들에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그렇게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삶은 집착이 심한 남편을 둔 페르세포네가 자신의 삶을 견뎌나가기 위해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페르세포네와 동등한 지위가 아닌, 그보다 낮은 계층에 속해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게는 불합리한 말이다. 그들은 혹독한 계절을 견뎌내야 하기에, 페르세포네처럼 삶을 즐기는 마음만으로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 카네이션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힘으로 봄을 가져올 노래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봄은 단순히 계절을 의미하는 게 아닌, 좋은 시절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삶의 고달픔에 지쳐있던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와 사랑에 빠진 것도 그가 피워낼 봄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피어난 사랑의 매개인 카네이션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쓰이는 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노래에만 심취한 오르페우스는 추운 겨울에도 생존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런 오르페우스의 몫까지 일하던 에우리디케는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탓에 하데스의 유혹에 넘어가 하데스타운이라는 공장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에우리디케는 더 이상 배고픔에 앓지 않지만,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며 자신의 영혼이 죽어갈 것임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에우리디케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찾기 위해 험한 길을 걸어 하데스타운으로 향한다. 한낱 인간인 네가 정녕 그 길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묻는 운명의 여신들은 등불을 들고 그를 위협한다. 그러나 내가 가겠다고 말하는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빛은 퍼져나가며 앞을 밝히고, 굳게 닫혀있던 장벽은 문을 열어준다. 어둡고 험한 길을 걷고 있음에도 그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대로 모두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대를 통해 얻은 승리는 극의 후반에서 무너진 연대에 따른 실패로 돌아오며 극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하데스는 말한다. 자신은 강탈하는 자가 아닌, 그들이 판매하는 것에 가격을 붙여 사들이는 자이며 그렇기에 정당한 방법으로 지하세계의 모든 것을 가진 주인이라고. 반면 운명의 여신들은 말한다. 하데스의 자비로 쓰러지도록 일하고 죽을 때까지 작업장에서, 창고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착취당하면 된다고.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넘긴 지하 공장의 노동자들은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한 채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점차 타인에게 냉담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인사하지 않으며,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주어진 일만을 반복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부수어가며 하데스의 배를 불리고, 그들의 고혈을 빨아들여 점점 더 부유해지는 하데스는 그것이 모두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배고프지 않을 자유에 그치지 않는다. ‘자유’를 위해 지하세계의 장벽을 세워, 자신들의 영역에 허가받지 않은 누군가가 출입할 수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하데스타운이 미국에서 처음 공연된 뮤지컬임을 고려하면 장벽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멕시코에서의 불법 이민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2005년부터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에 세워진 멕시코 장벽을 겨냥하고 있는 메시지기 때문이다. 하데스타운이 처음 공연되던 시기인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약으로써 멕시코 장벽의 강화를 다시금 내세웠기에 이는 사회적으로 더욱 각별하며, 시기적절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공생하지 않는 자, 하데스의 입을 통해 장벽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비판됐다.

오르페우스는 이 현실에 노래로써 반기를 든다. 자신의 노래로 봄을 되찾아오겠다고 말한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불러 지하세계 노동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들과 하나가 돼 연대하기에 이른다. 일을 멈춘 노동자들과 함께 하데스를 찾아 에우리디케의 귀환을 요구한 것이다. 만일 오르페우스의 요구에 따라 에우리디케가 하데스타운을 나서 지상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선례가 되어 노동자들의 요구가 이후로도 보장될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감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다만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통해 아내와의 화해 계기를 얻었기에 부탁을 들어줄 수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게 된 상황은 그가 기회를 주는 척 가면을 쓰고 오르페우스를 시험으로 내몬 이유가 된다.

원전 신화처럼, 하데스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따라오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오르페우스가 마지막 순간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말한다. 하데스가 이와 같은 조건을 내건 이유는 하데스 본인이 아내를 향한 집착에 시달리던 인물이기에, 오르페우스 또한 의심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르페우스에게는 에우리디케를 향한 의심 뿐 아닌, 오르페우스 자신을 쉽게 기만할 수 있는 권력자인 하데스에 대한 불신까지 존재했다. 이처럼 하데스의 뜻에 따라 에우리디케의 손을 놓고 지상으로 향하게 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이번에는 내가 가겠다며 부르는 노래를 듣지 못했다. 따라서 누구의 노래도 듣지 못하고 혼자가 된 그는 의심을 견딜 수 없었다.

아내를 믿지 못하고 의심을 품은 하데스와 오르페우스라는 두 인물은 극을 다시 젠더 문제와 연결시킨다. 여자는 믿지 못할 존재이며 보석으로만 그녀를 잡아둘 수 있다는 하데스의 주장은 오래된 편견에 속한다. 오르페우스도 하데스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의 시험에 무너짐을 통해 개인의 성품을 떠나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불합리함을 드러낸다. 또한 하데스와 오르페우스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바꿔내고자 하는 의지를 품은 이들인 반면 페르세포네와 에우리디케는 현실에 순응하고 그들의 행동에 의해 거취가 결정되는 자다. 불합리한 젠더 역할은 어느 쪽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들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됐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화해의 계기가 되었던 오르페우스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기에 극 안에서 이루어졌던 그들의 화해 또한 이내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스스로 ‘노래’가 되고자 한 뮤지컬 하데스타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격언처럼 사회 변혁 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의 연대다. 하데스의 입을 빌려 하데스타운이라는 극이 말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다. 군중 속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용기를 가질 수 있더라도, 흩어지면 겁이 나는 법이다. 오르페우스가 그러했듯, 연대가 무너지면 흩어진 민중들은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울 힘을 잃고 쉽사리 무너진다. 하지만 이 극은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극 내에서 진행자 역할을 맡은 헤르메스는 설령 슬픈 노래라고 하더라도, 결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믿어보며 다시 한 번 노래를 불러야 함을 주창한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며, 다시 시작한다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언젠가 세상에 봄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빌린, 노래로 주제의식을 이야기하는 하데스타운은 작중에서 오르페우스가 불렀던, 봄을 가져오는 노래와 같은 역할을 표방한다. 노래를 포함한 대중문화는 과거 대중을 마취시켜 현실에 안주시킨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며 대중을 일깨우고 현실의 문제를 깨닫게 하는 힘을 지니기도 했다고 재평가되었다. 그중에서도 노래는 사람을 고취시키는 힘을 지녔으며 모두와 공감대를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녔기에 시위 현장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왔다. 이를 고려하면, 하데스타운이 뮤지컬의 형식으로, 공연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꽤나 분명해 보인다. 2019년, 브로드웨이에 오른 후 8개의 토니상을 거머쥐며 영광의 길을 걷게 된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저력은 기술적인 면모와 노래의 훌륭함만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다.

바람저널리스트 (김유승)  yess@liv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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