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지속가능바람 오늘 부는 바람
‘남자 주인공이 없어도 괜찮아’ 로맨스판타지와 페미니즘의 결합
  • 바람저널리스트 (김유승)
  • 승인 2022.03.16 21:08
  • 댓글 2

(사진1) 카카오페이지 플랫폼 로맨스판타지 랭킹 캡처

2015년, 웹소설 플랫폼 조아라를 중심으로 로맨스와 판타지가 결합한 형태의 새로운 여성 장르가 등장했다. ‘로맨스판타지’, 즉 로판은 대부분의 작가와 독자가 모두 여성이다. 로맨스판타지에 여성의 관심사가 민감하게 반영될 수 있는 이유다. 2017년 페미니즘의 부상 이래 로맨스판타지에는 여성 인권이라는 정치적 의제가 반영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통념으로 바라본 로맨스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한 작품이 꾸준히 출간됐다.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여성 주인공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해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남성 주인공과 동등한 관계를 구축해나간다. 때로는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뿐 아닌, 여성 캐릭터간의 연대도 중요한 메시지로 다뤄진다. ‘남자 주인공이 없어도 괜찮아’ 라는 롹끼 작가의 작품 제목처럼, 남주인공과의 로맨스보다 여주인공의 삶과 모험이 더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웹소설으로서의 로맨스판타지

로맨스판타지는 리디북스, 카카오페이지와 같은 인터넷 플랫폼을 연재처로 삼는다. 인터넷 연재가 이루어지는 만큼 로맨스판타지는 기본적으로 현대의 웹소설 플롯에 충실하다. 바로 여주인공의 회귀, 빙의, 환생이다. 로맨스판타지에는 불행한 삶을 산 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회귀해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등장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게 된 주인공이 다수 등장한다. 한국에 살고 있던 주인공이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 후 다른 세계로 환생했음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거나,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전생에 대해 깨닫고 기억을 되찾기도 한다. 최근의 유행은 ‘책 빙의’로, 읽고 있던 책에 빙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깨달은 경우다. 회귀와 빙의, 환생을 거치며 주인공이 얻게 된 미래에 대한 지식, 혹은 전생의 기억에서 비롯된 특별한 지식은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은 미래를 바꿔나가며 성공을 얻거나, 전생의 기억에서 교훈을 얻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의 세계관은 서양 중근세풍의 신분제 사회를 배경으로 하되, 마법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여주인공이 마법을 사용하거나 정령을 부리는 등 판타지적 힘을 지닌 채 모험을 떠나 영웅이 되는 등 정통 판타지 소설 및 영웅 서사가 반영된 소설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맨스판타지 소설과 정통 판타지 소설의 차이점이 있다면, 로맨스판타지에서는 가족 내에서의 인정 투쟁 또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나 원래의 가족을 등지고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로맨스판타지에서 하나의 모험으로 그려진다. 로맨스판타지에서 이뤄지는 모험의 최초 목표가 여주인공의 사회적 성공이 아닌 경우가 잦은 이유다. 로맨스판타지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또는 가족에게 버려진 후 자신의 기반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며, 부가적 요소로 성공을 얻게 된 뒤 점차 사회적 자아에 눈을 뜨며 모험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나간다.

 

로맨스판타지에 반영된 여성의 심리

로맨스판타지와 여성들의 욕구는 연결되어있다. 로맨스판타지의 여주인공들은 자신의 남자 형제처럼, 혹은 장녀로서 짊어지는 짐을 내려놓고 막냇동생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가부장제로 인한 부모님의 남성 형제 편애 및 ‘살림 밑천’으로서의 장녀 역할 요구라는 현재 여성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독자인 여성들에게 가족의 영원한 사랑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존재하기에, 로맨스판타지에서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는 과정은 하나의 투쟁이다. 로맨스판타지의 한 갈래이자 최근 가장 흥행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육아물’은 투쟁의 한 사례다. 육아물의 여주인공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가족에게 애교를 부리고 사랑스럽게 행동해 가족의 사랑을 쟁취해낸다. 육아물의 여주인공들은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함을 당연시한다. 가족 내의 감정 노동을 자청하며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해나가고자 하는 이유다.

로맨스판타지의 전통적인 남주인공상이 여주인공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던 것 또한 독자인 여성들의 심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되어 수동적인 태도들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 여성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여주인공을 선호했다. 여주인공의 경험과 독자의 경험이 유사해야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회의 규율에서 벗어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여주인공은 독자들에 의해 문란하다며 비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독자의 연령대가 높은 소설일수록 소극적인 여주인공을 선호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거친 성격인 남주인공의 강제를 통해 여주인공은 자신의 미덕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애정과 쾌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지 않으며 로맨스를 즐기고자 한 독자들의 욕망 또한 충족되었다. 강압적인 남주인공은 로맨스물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온 이유 중 하나나, 여성들이 창작물에서 강압적인 남성상을 선호하게 된 것에는 사회적인 맥락이 존재함이 참작되어야한다.

 

로맨스판타지에 반영된 페미니즘

2017년 이후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급부상하며 로맨스판타지에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의제들이 다수 반영되고 있다. 2020년 리디북스의 로맨스판타지 연재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인기작 ‘상수리나무 아래’ 와 같이 여주인공이 인정 투쟁을 통해 남주인공과 상호 동등한 관계에 도달해 사랑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작품이 주류로 떠올랐다. 상수리나무 아래의 여주인공 맥시밀리언은 자존감이 낮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나,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성장하며 당당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맥시밀리언은 여주인공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다치지 않게 지켜내고 싶다는 이유로 안전한 곳에만 있을 것을 요구하는 남주인공의 요구를 거부하며, 점차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 뿐만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만든 작은 세계에 갇혀 서로를 망치고 질식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남자 주인공을 떠나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수리나무 아래와 같이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두 주인공의 동등한 관계 맺기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의 남주인공은 작품의 초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나, 점차 변화해 더 이상 여주인공의 삶을 제약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한다. 여주인공을 강제하는 태도를 보이는 남주인공이 변화했을 때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최근 로맨스판타지의 남주인공 트렌드는 ‘북부대공’이다. 차가운 북부에서 고립되어 생활하고, 황실의 핍박을 받는 동안 성격이 차갑고 덤덤해진 남주인공은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며 그녀에게만은 섬세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나쁜 남자의 궤와 비슷하지만, 북부대공은 서툴고 무뚝뚝할 뿐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쁜 남자와 차별화된다.

이처럼 인정 투쟁을 행하는 작품이 주류로 떠오르고 남녀 주인공의 동등한 관계가 선호되는 경향이 증가했다는 것에서, 독자들의 욕망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전통적 성역할을 반전시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내조하고 사랑하는 작품의 남주인공을 일컫는 키워드인 ‘키링남’, ‘조신남’과 같은 단어는 이미 시장에서 통용된 지 오래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신분 및 관계가 작의 시작부터 동등한 ‘이 결혼은 어차피 망하게 되어있다’,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겨온 공주인 여주인공과 가진 것 없는 평민 군인인 남주인공의 로맨스라는 전복적 구도를 선택한 ‘밤의 끝에서 당신을 만나다’ 등 여주인공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소설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주인공과의 사랑을 넘어, 빙의를 통해 귀족이라는 신분을 손에 얻거나 전생의 기억을 통해 사업을 성공시키는 등 여성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 상승 욕구 또한 로맨스판타지에 반영되어있다. 여주인공들은 귀족이라는 신분을 통해 얻은 지위를 이용해 사회적 평판을 다지거나 마법과 같은 특수한 능력으로 자신의 성취를 다진다. 또한 회귀나 빙의, 환생을 통해 얻은 미래의 지식 혹은 다른 세계의 독특한 지식을 이용해 사회적 성공을 얻어내기도 한다. 로맨스판타지에서 일과 사랑은 구분되거나 하나를 선택해야 할 대상으로 통용되지 않으며,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결혼과 육아의 자유를 누린다. 이를 위해 여주인공은 작중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과 연대를 실천하거나 사회구조적인 여성 차별을 정치적인 자리로 끌어와 구조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여주인공이 직접 페미니즘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로맨스판타지가 나아갈 길

로맨스판타지에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로맨스판타지의 기본적 배경이 되는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 차별은 당연한 것처럼 그려진다. 독자들은 신분 차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여주인공이 지닌 귀족의 지위를 존중하지 않는 평민에게 강한 벌을 줄 것을 요구한다. 현대 사회가 자본이 신분을 대신한 계급 사회라는 것을 감안하면, 계급제의 옹호는 상당히 우려되는 지점이다. 로맨스판타지의 모티브로 삼은 배경과 등장하는 문물이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로맨스판타지는 제국주의 미화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로맨스판타지에서 직접적으로 식민지가 등장하지는 않으나, 주인공들이 누리는 출처 없는 부는 현실적인 불편함을 도려내고 벨 에포크의 빛나는 면만을 취한 것에 가깝다. 대다수 등장인물이 백인이며 서양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에서 따라오는 서양 선망과 인종주의 문제는 덤이다.

뿐만 아니라 로맨스판타지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시장 페미니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로맨스판타지의 페미니즘은 외모지상주의에 친화적이며 꾸밀 권리를 추구하는 것에 한없이 가깝다. 코르셋이라는 상징적인 장치를 벗기고 더 편한 드레스를 입을 자유는 주창될 수 있으나, 화장하지 않을 자유는 여주인공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에 의하면, 이성 간의 연애와 결혼,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경제적 성공, 매력적인 외모와 신체의 자율성을 함께 가질 권리에 집중하는 페미니즘은 임금차별과 같은 구조적 차별이 그대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선택과 소비를 통해 갈등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페미니즘의 의의를 퇴색시킨다. 로맨스판타지의 페미니즘은 이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된 로맨스판타지 장르 중 하나인 ‘육아물’의 경우는 더하다. 육아물은 여성 아동의 애교를 생존의 무기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혐오와 아동 혐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성 캐릭터의 쟁취를 위해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일명 ‘여적여’ 또한 로맨스판타지에서 여전히 흔히 다뤄지는 소재다.

로맨스판타지 시장은 지금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자사 웹소설 플랫폼이라는 콘텐츠 사업을 통해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로맨스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웹툰과 드라마 또한 꾸준히 제작되어 소비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처럼 점차 성장해나가며 장르의 덩치를 불리는 중인 로맨스판타지이나, 장점과 한계가 뚜렷한 만큼 로맨스판타지의 긍정적인 점은 확대하고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들은 자정하기 위한 독자들의 적극적인 요구가 필수적일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은 로맨스판타지가 어떤 길로 나아가게 될지 꾸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바람저널리스트 (김유승)  yess@live.co.kr

<저작권자 © 지속가능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바람저널리스트 (김유승)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DLDL 2022-08-14 19:14:50

    육아물은 여성 아동의 애교를 생존의 무기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와 아동 혐오...
    로맨스에서 남성의 얼굴과 남성의 몸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남성 혐오를 느껴야 하는건가요? 학원물에 등장하는 여자나 남자들은 미성년자니까 여기에도 미성년자 혐오를 느껴야되는건가..?   삭제

    • 라미 2022-07-24 09:08:11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평소 로판보며 막연히 생각했던 부분들을 잘 쓰인 글로 읽으니 재밌네요!   삭제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