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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되었을까
  • 김유진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 승인 2021.02.2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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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변신」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 본 이는 많지 않더라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손꼽을 것이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인해 상처가 곯아 끝내 숨지게 되는 대목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목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다른 이야기들은 다소 흐릿한 잔상으로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쉽기도 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변신」은 단순히 그레고르 잠자의 ‘벌레화’와 ‘사과’만 남겼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흔히 바퀴벌레의 형상으로 유추되는 그레고르 잠자의 외형과 가히 충격적인 결말이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과 그 안에 내포된 시대적 배경, 작가가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워버린 셈이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는데, 그의 모습이 벌레로 변해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비명을 지르거나 기겁하고, 혹은 기절을 할 정도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그 상황에서도 출근을 걱정할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충격에 빠지는 것은 그의 가족 등의 주변인이다. 물론 그레고르도 처음부터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섯 개가 된 다리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려 애쓰며, 인간일 때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발버둥치는 통에 한참을 침대 위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그 장면까지 그는 명확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과 벌레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순간은 갑자기 일어난다.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문 밖의 지배인에게 말을 걸지만, 그것은 다만 짐승의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레고르의 인간성이 흐려지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점차 ‘벌레’인 자신에게 동화된다. 원래의 자신이 좋아했던 빵과 우유가 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썩은 음식’에 입을 대는 자신에게 느끼는 거부감도 점차 흐려진다. 그는 벌레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 다니고, 천장을 오르고, 어두운 곳을 찾아 숨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레고르의 심정을 직접 드러내던 초반의 서술과 달리 후반은 점차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화하고, 하숙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그레고르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을 거듭한다. 그는 정신마저도 점차 벌레의 육체와 동화되어 간다. 그에 따라 그의 가족들도 서서히 그레고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나아가 그들은 그레고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산업근대의 출현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는 한창 산업화 사회가 도래하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전통사회와 다르게 이웃과의 교류가 급격히 감소하며 특히 소시민은 오직 노동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은 벌레가 된 이후 자신의 방 안에만 고립되어 살아가던 그레고르 잠자에 투영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레고르 잠자로부터 인간의 외형을 빼앗고, 그를 벌레로 전락시켰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작품 안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이는 비단 그레고르만은 아니다. 작가는 그레고르와 더불어서 그의 가족들의 태도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기 무섭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아버지, 그레고르를 아들이라 생각하기보다는 그를 무서워하고, 때문에 항상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어머니와, 집에서 가장 그레고르를 생각하고 위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애정보다는 의무감으로 모든 굳은 일을 수행하는 여동생까지. 가장이었던 그레고르가 직장을 상실하기 무섭게 그들은 그레로르로부터 등을 돌린다. 특히 작품이 후반부를 향해 진행될수록 그들로부터 이전의 가족애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변신」이 그레고르 잠자가 사망하고 난 이후 가족들이 후련함을 느끼며 다른 집으로 이사하고, 이후 그의 부모님이 여동생인 그레타를 결혼시킴으로써 새로운 자금을 마련하리라는 암시가 나오는 것으로 갈무리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모순적이나 벌레인 그레고르가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흔히 일컫는 ‘정상가족’의 모습 / 출처:픽사베이)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 / 출처:픽사베이)

 

위의 두 번째 사진에 존재하는 호랑이는 무리 동물이 아니다. 늑대, 사자 등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도 인간처럼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규칙을 만들어 생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새끼를 돌보는 것은 이성보다는 순수한 본성의 영역이다. 나아가 동물들은 최선의 생존을 위해 나약한 새끼는 망설임 없이 내치기까지 한다. 인간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도 ‘벌레’는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인간성이란 태초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 외 동물들과 구별된다. 이는 다른 문장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에서의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고립되면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의 사회에서도 자·타의에 의해 사회와 척을 지게 되는 이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장애인, 외국인 등이 있으며, 근래에는 그나마 상황이 다소 나아진 편이기는 하나 이전에는 여성도 이 범주에 속했다. 그들은 온전한 사회적 압박이라는 타의에 의해 그레고르 잠자처럼 자신의 방 안에 고립되고, 인간성을 빼앗긴다. 기계화는 사회적 관계맺음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산업화 이후 타인과의 교류가 보다 어려워지면서 이런 경향성은 더더욱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가 나약하다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고립시켜 버린다면 그 이는 더 이상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노라 여겨도 무방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이 가진 동물과의 차이점, 그렇기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레고르의 이런 육체적인 변화는 다만 그 자체로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그레고르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고민하고, 가구를 재배치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그레고르의 모습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이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만 간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레고르에게 느끼던 동정심도 점점 옅어진다. 그는 이제 그들의 가족이 아닌 눈엣가시에 불과하다. 결국 그레고르로 인해 하숙생까지 전부 떠나버리게 되자 그들은 마침내 그레고르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 순간 그레고르의 사망 선고는 이미 내려진 셈이다. 그들은 그레고르의 사망 이후 이사를 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아버지, 어머니에서 잠자 씨, 잠자 부인과 같은 호칭의 변화는 그레고르가 죽음으로서 완전히 인간성을 상실하고 절대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벌레’로 전락하지 않기 위하여

 

「변신」에서 벌레가 된 인물은 그레고르 잠자였지만, 실질적으로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이 또한 그레고르가 유일하다. 그는 가족의 존재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나중에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기 위해 스스로 문을 열고 그를 고립시키던 방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가 어떤 방향으로는 벌레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인간, 즉 ‘정상성’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레고르의 가족들 역시 각자의 이유로 사회에 나가 온전한 사회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그레고르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포장한다. 만약 그레고르가 여동생의 연주를 듣기 위해 스스로 문을 열기 전 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먼저 굳게 걸어잠궜던 방문을 열고 그레고르에게 손을 뻗었더라면 그는 다시 그들이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유진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yess@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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