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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년 ‘이재명’,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가
  • 유진현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 승인 2021.02.2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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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사 생전의 모습(자료출처: 국가보훈처)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스러운 혼과 의로운 혼백은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다.”

- 이재명 의사의 최후 진술 中

 

이는 이재명 의사가 순국하기 전,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던 한 마디였다. 독립을 향한 그의 대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이던 조선의 청년 ‘이재명 의사’, 하지만 필자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서점에 들러 한국사 문제집을 펼치다가 우연히 이재명 의사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비교적 정보가 많은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그는 오로지 ‘명동성당 의거’라는 식으로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짧은 문구가 필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어째서 그에 대한 정보는 이리도 간략한가. 그가 조국을 위해 한 일은 단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인가. 이는 계속해서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잔상처럼 번졌고, 그를 계기로 이재명 의사에 대한 삶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격동의 시대,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으로’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평양 군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장차 조국을 지키기 위해 백골이 되도록 일제에 맞서 싸우게 될 이재명 선생이었다. 1904년, 그는 평양에서 학교를 마치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미국 노동 이민회사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5년, 조선인들을 비통하게 만들었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공부를 접어두고 항일 운동을 위해 미국 본토로 거처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 본토에서 안창호 선생이 주도하고 있던 공립협회에 가입해 항일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렇게 그가 항일 운동을 이어가고 있던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황제에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대한제국을 무력의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정미 7조약 체결이었다. 그러자 공립협회는 공동회에서 매국적 숙청을 위한 실행자를 선발하였는데, 여기에 이재명 선생이 지원하였다. 그 해,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위협하는 이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에게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의 평양 순행 소식이 들렸고, 그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근처 장소에 매복하였다. 하지만 이를 이토 히로부미가 눈치챈 것인지 그날따라 순종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순종의 안전을 위해 안창호 선생이 그를 만류하였고, 결국 이날의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다.

 

‘공범이 있다면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다’

 

그러던 중, 1909년 친일단체 일진회에 의해 조국을 팔아넘기기 위한 성명서가 공포되었고, 더 이상의 지체는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길 뿐이었다. 이재명 의사는 마지막으로 결의를 다지며,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행사에는 이완용을 포함한 일제의 앞잡이들이 참석한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도식 당일, 그는 군밤장수로 변장해 성당 밖에서 서 있다가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그의 앞을 지나는 순간 달려들어 단검으로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수차례 찔렀다. 그리고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여유 있게 담배를 꺼내 들어 피웠다고 한다.

 

그의 의연한 태도는 법정에서도 변함없었다. 일본인 판사가 이 사건의 공범들을 말하라고 추궁하자, 그는 ‘공범이 있다면 우리 2천만 동포 모두다.’라며 판사의 물음을 받아쳤다. 1910년 5월, 이재명 선생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4세 청년이었다. 여생을 마칠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청춘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기개는 꺾일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목숨이 아닌, 조선의 독립을 택하였다. “공평하지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그렇게 순국하기 전, 이재명 선생은 그의 독립 의지를 다시 한 번 법원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는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가

 

강한 바람과 함께 추위가 지속하던 지난 17일, 필자는 명동 성당을 찾았다. 명동 성당의 어딘가에 이재명 선생의 의거 터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그곳을 찾아가 선생의 순국을 기리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필자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이재명 선생의 의거 터에 가기 전,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하고서 집에서 출발하였다. 알 수 없는 설렘도 잠시,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의 의거 터는 발견할 수 없었다. 혹여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지도를 몇 번이고 확인하였으나, 여전히 지도는 내가 도착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명동 성당을 관리하는 한 직원분에게 의거 터 위치에 대해 여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곳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며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그 직원분을 지나쳐 명동 성당 계단을 올라가 다른 직원분에게도 물었지만, 그녀 역시 같은 반응으로 답하였다. 명동 성당 온 전체를 돌아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한 직원분이 의거 터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며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였다. 그녀를 따라가다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아까 전 필자가 도착했던 장소였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선생의 의거 터가 바로 필자의 등 뒤에 있었던 것이다. 명동 성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 전, 한 그루 나무 옆에 조그마하게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재명 의사 의거 터 표지석 (자료출처: 직접 촬영)

 

선생의 의거 터는 그를 기리는 조각상 없이 작은 표지석이 전부였다. 진안군 진안읍에 조성되어있는 이재명 의사의 성역화 단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표지석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던 중, 주위를 둘러보니 그 누구도 그의 표지석을 들여다보는 이 하나가 없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차디찬 바람이 불어오자 괜스레 마음 한쪽이 씁쓸해짐을 느꼈다. 손을 뻗어 그의 표지석을 쓰다듬는 나의 손끝이 이내 저릿해지고 차가워졌다.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지켜내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자신을 내던진 조선의 청년 이재명 의사. 오늘날,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겨져야 할 그는 그저 한 그루 나무 옆에 웅크려 외로이 머무르고 있었다.

 

광복이 찾아오고,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듦에 따라 점차 사람들은 그의 존재와 그가 써 내려간 민족정신을 잊어가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이재명 의사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를 포함한 다른 수많은 독립운동가 역시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들을 추모하기 보다는 현대를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 그러나, 끝없이 투쟁하며 세계 각국에 조선이 처한 현실을 알린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시대가 변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들의 역사를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혹여, 우리가 지나는 길목에 우연히 그들의 발자취를 발견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춰 그들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뜻을 표하길 바라며.

유진현 바람 온라인 저널리스트  yess@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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