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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발전" 개념의 등장

그렇게 ‘풍요롭게’ 살다보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 백 년, 짧게는 한 150년 만에 인류가 지구 탄생 이래 가장 큰 풍요를 누리는 생물 종으로 도약하면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인류에게 국한되지 않고 지구와 지구상 모든 생명체와 관련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구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보편적인 의제인 ‘지속가능’의 문제가 도출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입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정의된 건 1980년대 후반이지만 문제의식은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로마클럽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성직자이자 지식인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토마스 맬더스 같은 사람들이 지속가능의 문제를 고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맬더스는 인구가 기하급수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이 산술급수로 느는 데 따른 ‘비대칭’에 주목한 것이지요. 이 비대칭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지만 종국에는 다 같이 적게 먹거나 아니면 일부는 굶어야 할 겁니다. 다 같이 적게 먹는다는 발상은, 성욕을 통제해 예방적으로 인구증가를 억제할 수 있다는 맬더스의 처방만큼이나 비현실적입니다. 인구와 식량의 비대칭은 사회 내에 비대칭을 키우는 것으로 귀결합니다. 종국에는 맬더스의 말대로 기아와 빈곤이 사망률을 높여 비대칭은 해소되겠지만 그 과정은 참담할 것입니다. 맬더스의 시선은 냉정해 보입니다. 그에게 빈민들은 어차피 ‘지속가능’의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속가능을 저해하는 세력이었겠지요. 벌레나 다름없었습니다. 맬더스의 지속가능 관점은 계급적인 이해, 그것도 지배계층의 이해에 기반하고 있기에 협소한 지속가능, 나아가 사이비 지속가능으로 규정해도 되겠습니다.

1798년 맬더스의 <인구론>이 출간되고 2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로마클럽에서 보고서를 냅니다. 1972년 발표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는 맬더스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1950~60년대에 미국 등 서구를 중심으로 유례없는 성장기를 거치면서 마찬가지로 서구문명을 중심으로 인류가 갖게 된 자신감은 1970년대 들어 위축됩니다. 1968년의 68혁명과 1971년 미국의 금본위제 포기가 상징하듯 인류문명의 자기제어능력은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성장의 한계>에서 명시적으로 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자기제어능력의 핵심은 온실가스 감축을 통한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대처로 집약됐습니다.

<성장의 한계>는 지구온난화가 지구촌의 핵심의제로 떠오르기 전에, 관련된 기존 문제들에 관한 ‘종합고민세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래프가 <성장의 한계>에서 하려고 하는 얘기를 웅변합니다.

<성장의 한계> 초반에 나오는 지구사용량 그래프는 여러모로 시사적입니다. 가로로 이어진 그래프 A는 지금의 수용능력입니다. 오른쪽으로 상승하는 그래프는 인간의 ‘지구 사용량’입니다. 세로축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지구의 숫자’라고 돼 있죠. 특정시점 인간의 ‘지구 사용량’에 맞추려면 지구가 몇 개 필요한가를 설명한 것입니다. 당연히 화성이나 달에서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지구 1개’에 해당하는 ‘사용량’이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래프는 1970년대 후반에 이미 ‘지구 1’을 넘어섰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류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지구의 5분1조각이상을 빌려와야 합니다. 지구의 용량을 40% 이상 초과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빌려올 수 없으니 지구는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가 지구를 괴롭힐 겁니다. 나중에는 지구가 감당하지 못해, ‘지구1’을 가로질러 우상향하는 그래프 자체를 털어낼지 모릅니다. 그 말은 지구가 자신의 표면에서 인간을 털어낸다는 뜻이겠지요.

<성장의 한계>는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해 인구, 공업생산, 식량, 자원, 환경오염 등 5가지 주제에 걸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습니다. <성장의 한계>는 현대사회에 큰 영감을 줬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환경오염은 5가지 주제의 하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후 환경오염은 독자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제로 제안됩니다. 지구온난화와 결부돼서입니다.

지금 논의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본격 제시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서막을 열었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습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입니다. 1962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말하는 침묵의 봄은 환경오염으로 새들이 울지 않는, 즉 새들이 죽어 버린 암울한 세계입니다. <성장의 한계> 10년 전에 나온 <침묵의 봄>은 지속가능발전이란 의제를 선구적으로 제안한 기념비적 저작입니다.

198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 통용되는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이 정의됩니다. 유엔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위원회’(WCED ;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에서 발표한 보고서인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를 통해서입니다. 보고서 작성 책임자인 전 노르웨이 수상 그로 할렘 브룬틀란을 따서 <브룬틀란(Brundtland) 보고서>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지속가능발전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의미한다. 두 가지 핵심적인 개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욕구의 개념, 특히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적인 욕구. 여기에 일차적인 우선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기술과 사회조직의 상태가 현재와 미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의 능력에 미치는 한계의 개념.” (<우리공동의 미래, 세계환경발전위원회, 조형준 옮김. 새물결)

(Sustainable development is development that meets the needs of the present without compromising the ability of future generations to meet their own needs. It contains within it two key concepts : the concept of 'needs', in particular the essential needs of the world's poor, to which overriding priority should be given; and the idea of limitation imposed by the technology and social organization on environment's ability to meet present and future needs.)

 

일반적으로 지속가능발전 하면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의 관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시적(通時的)인 접근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세대들’에만 시선을 고정하면 반쪽 이해에 머물고 말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은 같은 세대 내의 불평등 해소 또한 강조합니다. 이른 바 공시적(共時的) 접근입니다. 통시적이면서 또한 공시적인 접근이 함께 이뤄져야 지속가능발전의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습니다.

안치용 / 발행인  drago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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