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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세계에서 그 세계를 더욱 개선하려는 노력

 

3T 말고 한국사회와 인류문명을 위협할 다음 T는 테러와 폭력(Terror & Violence)입니다. 지속가능사회 주제와도 연관이 됩니다. 9ㆍ11 이후의 세계는 테러와 폭력의 상시화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테러와 폭력의 자양은 양극화가 공급합니다. 지역 내의, 또 전세계적 양극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례없이 긴 평화 시기를 보내는 지구촌의 보편적 징후가 됐습니다.

양극화와 테러ㆍ폭력은 현대사회의 샴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프리드먼의 말대로 세계는 평평해졌는지도 모릅니다. 양극화와 테러ㆍ폭력의 관점에서라면 말입니다.

소수가 다수를, 즉 1%가 99%를 지배하고 빼앗아가고 상시적으로 수탈하는 구조에서, 이 구조가 평화적으로 변경될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폭력과 테러는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적이라는 측면에서 ‘점령(Occupy)’ 운동은 아주 예외적 흐름일 수 있습니다. 희망과 대안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을 되돌릴 가능성이라곤 없는 가운데 일어난 평화시위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가진 자들이 스스로 가진 것을 내어놓아야 양극화로 인한 절망의 경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스스로 내어놓는 가진 자는 역사 이래 드물었습니다. 획기적인 구조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회 저변에 짙게 깔린 절망의 연대는 지구촌과 개별사회에, 따라서 한국사회에도 테러와 폭력의 광풍을 몰고 올 것입니다.

형태의 문제이긴 하지만 응당 분노해야 할 것을 분노하는 태도는 정당합니다. 사회의 구조개혁을 통해 분노의 에너지를 테러와 폭력이 아닌 존중과 공유의 흐름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기득권층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눈물과 관용(Tears & Tolerance)’이 최종적인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눈물로서 용서를 빌고, 분노하지만 용서하고 함께하는 관용정신이 시대정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지속가능한 사회의 큰 틀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화와 양보는 눈물과 관용의 동의어이고, 테러와 폭력의 반대말입니다. 결국은 정치인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경제ㆍ사회시스템은 소외시키지 않고 배제를 일으키지 않는 끈기 있고 정직한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출될 수 없습니다.

절제된 분노로 상호 공유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제대로 된 정치의 복원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테러ㆍ폭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첩경이라 하겠습니다.

5가지 T에서 ITㆍBTㆍNT 다음의 2가지 T, 즉 Terror & Violence와 Tears & Tolerance는 사실상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T의 마지막 T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바로 E.T(외계인)입니다. E.T는 문학과 영화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최근엔 영화 <아바타>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센타우리자리의 판도라라는 행성입니다. 판도라란 행성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지만 센타우리 자리는 실존하는 별들입니다. 센타우리자리의 알파 별은 태양으로부터 4.3광년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천체물리학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은 외계 지적생명체의 존재를 거의 100% 확신합니다. 확신의 근거는 매우 풍부합니다. 단적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별(태양과 같은 항성)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모래보다 숫자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우리 태양이란, 지구로 치면 영종도 을왕리의 구석진 백사장 한쪽 귀퉁이에서 집어들은 모래알 하나 정도도 못됩니다. 지구는 그 모래알에 붙어 있는 미생물 같은 존재이겠지요. 우리가 우주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 또는 지적생명체라고 믿기 힘든 근거는 이밖에도 무궁무진합니다.

외계생명체와 조우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가 너무 외진 곳에 살고 있어서일지 모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로는 당분간은 태양계 밖으로 인간이 우주여행을 떠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우리가 외계 지적생명체와 만나게 된다면 그쪽에서 우리를 방문했을 때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외계인의 방문은 인간 인식의 지평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대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방문은 지평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를 찾아온 E.T라면 분명 우리보다 월등히 발전한 문명에 소속돼 있을 것입니다. 그때 인류의 선택은 그가 우리한테 우호적이기를 바라며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외계로 내보낸 무수히 많은 전파들 가운데 어떤 걸 우리보다 월등히 앞선 기술력을 가진 외계생명체 문명이 잡아낸 이유가 무엇이 될까요.

그 이유는 외계 지적생명체가 지구에 도래하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안다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외계인이 언제 지구를 찾아올지, 그들이 인류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우리 노력과는 무관합니다. 그들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 위협을 느낀다한들 우리의 선택은 극도로 제한적입니다. 영화 <알파빌>에서 슈퍼컴이 지배하는 세상을 탈출하는 것과 같은 시나리오는 E.T와 관련해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E.T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행동은 본전을 건지기 힘들어 보입니다. 관점에 따라 우리 인간은 어느 부잣집 정원의 연못 속에 살고 있는 주제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종으로서 인간은 어쩌면 전체 연못에서 군림하는 거대잉어일 수 있겠지만 그래봐야 주인의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연못 속 잉어를 들여다보듯, 누군가 우리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거대 차원에서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인의 변덕은 우리에게 종말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거대한 존재를 인식할 가능성은, 물 밖에서 언뜻언뜻 드리우는 그림자의 존재를 물고기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듯 사실상 전무합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문제를 붙들고 그림자의 의미를 알아내려 노력하겠지요.

일반인이라면 굳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외면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실적으론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외면하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시된 지속가능성을 저해할 여러 가지 T들 가운데 E.T야말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겠지만 물 속 존재가 물 밖 존재에 어떤 대응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비록 아무리 미미한 것일지라도 주어진 세계에서, 그 세계를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노력을 쏟는 게 차라리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지속가능은 사실 지속불가능의 연쇄에서 우연찮게 나타난 이례적 현상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이 됨으로서 초월적인 존재로 진전할 단초를 얻듯, 이례적 현상의 우연성을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잉어라면 어차피 주인이 되거나 주인의 인식을 갖지는 못할 터이고, 그렇다면 잉어의 찰나적 인식론에서 구원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인간임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치용 / 발행인  drago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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