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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아줌마와 울고넘는 박달재

 

고려와 조선의 공녀(貢女) 또한 이향의 존재입니다. 더러 공녀가 귀향(歸鄕)하거나 환향(還鄕)했는데, 돌아온 공녀를 ‘환향녀’라고 합니다. 몽골로 보내진 고려 여인들 중엔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기황후 같은 인물이 있기도 했지만 공녀의 삶은 이향의 삶으로 서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환향은 기쁜 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듯 이들의 귀향은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합니다. 돌팔매과 천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공녀를 ‘환향녀’로 불렀고, 어느 사이 이게 욕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화냥년’이란 표준말로 우리말에 비극적 상흔을 잊어버린 채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대민족, 공녀, 오디세이 모두 귀향이야기입니다. 이향과 귀향의 대립과 고향에 대한 가치부여는 인류가 정주문명을 만든 이래 인간의 숙명이 됐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진 자만이 그 무엇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되고,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안타까워합니다.

 

<고향아줌마>

술잔을 들다말고 우는 사람아

두고온 임생각에 눈물 흘리며

망향가 불러주는 고향 아줌마

동동주 술타령에 밤이 새누나

밤이 새누나

 

들어찬 목노주점 나그네 마다

넋두리 하소연에 풍년도 마다

내 고향 사투리에 고향 아줌마

나그네 인생길에 불빛만 설다

불빛만 설다.

 

<울고넘는 박달재>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이 글을 읽고 노래가사임을 알아챈다면 나이가 좀 들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고향아줌마>는 김상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대중가요이고, <울고넘는 박달재>는 박재홍이 불렀습니다. 젊은 세대엔 <울고넘는 박달재>가 조금 더 유명할 것 같습니다.

<고향아줌마>보다 <울고넘는 박달재>가 조금 더 오래된 노래입니다. 지금으로선 무척 가사가 촌스럽습니다. 망향가 불러주는 고향 아줌마, 내 고향 사투리에 고향 아줌마, 나그네 인생길 등. 그런데 <고향아줌마>는 가사의 고풍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유행가입니다. 발표년도가 1971년입니다. 당시 사회상이 고향아줌마 앞에서 밤을 새면서 넋두리하고 고향을 그리워한 것이지요. 40년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보다는 오히려 <마틴 기어의 귀향>과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도시화ㆍ산업화 때문에 농촌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해, 저임금에 열악한 근로환경에서 돈을 벌고, 공돌이ㆍ공순이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이른 바 산업역군으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행한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가 가져가야 될 부의 몫을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는 자본가에게 넘겨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와서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고달픈 노동 속에서 살아간 우리 바로 윗세대 노동자들의 어떤 설움 같은 게 <고향아줌마>에는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때의 이향과 귀향에는 한 맺힌 절실함 같은 게 있습니다.

<울고넘는 박달재>는 1950년에 나온 노래입니다. 박달이라는 선비와 금봉이 사이 사랑의 전설을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요즘 20대는 트로트 하면 우숩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울고넘는 박달재>는 되게 슬픈 노래입니다. 노래가사를 보면 금봉이가 남는 사람이고, 박달이 떠나는 사람입니다. 둘이 사랑했겠죠. 2절에 가면 귀향 이야기(돌아올 기약)가 나옵니다. 돌아올 기약을 성황님께 빌고 가라는 얘기는 돌아올지 못할 걸 안다는 뜻입니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황님이 도우셔야 돌아올 수 있겠구나 하는 냉정한 인식입니다.

흥미로운 건 사랑하는 사람이 못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은 사실 금봉이의 고향이지 박달의 고향이 아닙니다. 금봉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박달의 고향이 아닌 자신의 고향입니다. 금봉이는 특정한 공간에 얽매인 존재입니다. 그 공간은 남루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며 산골에 사는 금봉이라는 처자가 해줄 수 있는 게 기껏 도토리묵입니다. 도토리묵 쒀가지고 허리춤에 채워주는 것. 한나절 하루정도 지나면 다 쉬는 도토리묵이지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겠지요. 그러고는 금봉이는 그냥 기다립니다.

김상진의 <고향아줌마>는 떠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울고넘는 박달재>는 보내는 사람의 관점입니다. 누구의 슬픔이 더 클까요.

<고향아줌마>나 <울고넘는 박달재>란 노래가 잊혀졌듯 이제 더 이상 귀향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향의 실종은 현대인이 금봉이처럼 철저하게 고향에 얽매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얽매일 고향이 없기 때문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금봉이와 달리 현대인은 ‘고정점을 잃어버린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요.

요즘 유행가 중에 고향을 소재로 삼은 노래는 아마 찾기 힘들 겁니다. 태어난 곳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출생지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누구도 고향에서 추방당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만일 고향이란 곳을 떠나 있는 상태라면 그 이향은 자발적 이향이며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벨론유수나 고향아줌마와는 형편이 판이합니다. 지금이라면 금봉이도 따라나서 함게 KTX를 탔겠지요.  

 

안치용 / 발행인  drago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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