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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흐름이 막혔을 때 일어난다"

 

돈의 흐름에 생긴 이상현상은 대기업에서 뿐만은 아닙니다. 대기업들이 돈을 쌓아 놓고 버티자 불황국면에 정부가 나서게 됩니다. 정부지출은 경기를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방위로 확대됩니다. 2008년 이후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목격한 현상이지요.

서브프라임 사태 자체가 이상현상에서 비롯한 재앙이었습니다. 금융상품은 저수지의 물 유입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저수지인 금융권은 저수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시의적절하게 논밭으로 물을 흘려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논밭으로 물을 안 보내고 다른 쪽으로 물꼬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대기업들이 굳이 금융권 돈을 쓸 필요를 못 느낀 탓도 있겠죠.

이때 논밭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대신 물을 가지고 별도로 장사하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저수지의 물을 논밭이 아닌 다른 저수지로 이동시켜 주면서 이익을 취한 게 말하자면 파생금융상품입니다. 이제 물은 저수지에서 저수지로 흐르게 되고 한번씩 저수지를 옮겨갈 때마다 가상의 수익이 발생합니다. 논밭에 물을 흘려주면 농작물을 수확해 물값을 대겠지만, 저수지끼리의 이전에서는 최종적으로 누가 물값을 댈지가 모호해집니다.

물론 극단적으로는 저수지 안의 물고기를 잡아서 물값을 마련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아쉬운 해법마저 불가능해지는 게 저수지끼리 물을 유통시키면서 일종의 통행세를 걷는 방식은 나중에는 실제 물을 흘리지 않고 흘릴 약속만으로 통행세를 취하는 방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원래 논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목적으로 존재한 저수지가 실제로 용수를 공급하지 않고 공급태세를 확인하는 것으로 용수공급을 대신한 것이지요. 금융의 자기복제가 일어났다고 봐야겠지요.

전통적인 금융과 제조업에서는 동맥과 정맥처럼 피가 돌아갑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인 것처럼 금융은 제조업을 돌리기 위한 혈액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금융은 제조업 후원이란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점점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면서 금융과 제조업 간 거리는 급격히 멀어지게 됩니다.

화폐의 발전과정과 흡사합니다.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돈’으로 유통시키다가 한참 지나 지폐가 등장합니다. 이때 중앙집권적인 정부의 확립과 관료제를 통한 사회통제 능력의 확보가 중요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정부가 금의 지급을 보장하는 증서를 써준 게 지폐입니다. 물론 정부의 지급보증 없이 개별 은행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었지만 화폐야말로 국가적인 현상이란 관점에서 보면 정부 혹은 중앙은행의 권위가 화폐를 성립시킨 기반이었습니다.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금 1온스를 받은 뒤 보관증 성격으로 내어준 게 태환 화폐입니다. 즉 나중에 누구라도 35달러를 가지고 와서 바꿔달라고 하면 금 1온스를 내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부에 금을 맡기고 종이 쪼가리(보관증)만 갖고 다닙니다. 지폐보유는 금을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당연히 금 대신 (태환)지폐를 가지고 다니겠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태환이 중지됩니다. 닉슨 미 대통령이 1971년 전격적으로 태환중단을 선언해 버립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성립된 자본주의권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슈퍼파워 미국의 통화 달러를 중심에 둔 시스템입니다.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 가운데 미국의 달러만 금과 태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통화들은 태환을 포기합니다. 대신에 달러에다 자국 화폐를 연동시켜 ‘간접 태환’이 되도록 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전격 발표로 지구상에서 태환지폐는 종적을 감춥니다. 사실 공급탄력성이 다른 두 상품(달러, 금)을 인위적으로 묶어놓겠다는 발상은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결별한 달러와 금이 재결합할 확률은 ‘0’입니다. 금을 내주겠다는 권위를 바탕으로 한 보증은, 권위를 바탕으로 한 숫자로 변모합니다. 애초의 연결이 멀어져도 한참 멀어졌습니다.(보증이냐 숫자이냐는 화폐의 인식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가 어떤 권위이냐가 화폐의 존재론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의 한 대목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처럼 흩어져”에서 드러나듯 화폐는 한 순간에 낙엽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금융과 제조업 간의 연결이 희박해진 것처럼 달러와 금 사이의 연결 또한 증발하고 맙니다. 영화 <아바타>의 전개과정과 흡사합니다. 아바타는 실존 인물의 표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연결이 끊어져 아바타만 생존합니다.

아바타처럼 화폐화는 시뮬라시옹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원본을 잃어버린, 혹은 도망친 이 복사본은 시뮬라크르로 볼립니다. 지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성된 가장 대표적인 시뮬라크르입니다.

다시 파생금융상품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예금ㆍ적금ㆍ주식ㆍ채권 같은 것들을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 혹은 대상자산이라고 합니다. 기초자산에서 파생된 금융상품이 파생금융상품입니다. 애초에 기초자산과 파생금융상품 간에는 연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생금융상품이 스스로 복제를 반복하다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초자산이 무엇이었는지 망각하게 됐다는 뜻이죠.

좀 잔인한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실험용 원숭이 10마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숭이들의 팔을 하나씩만 잘라서 다른 원숭이 몸에다 붙입니다. 다음에는 머리를 잘라내서 다른 원숭이 몸에다 붙입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뭉쳐서 덩어리를 만든 후 10마리의 개로 만들어냅니다. 과격한 예를 들었습니다만, 마지막 형태에서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이렇게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괴물 개들이 세계를 뛰어다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괴물의 탄생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흐름이 막혔을 때 일어났습니다. 사회책임투자(SRI)를 얘기하기에 앞서 먼저 건강한 돈의 흐름을 복원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자본시장, 금융시장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괴물들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는 한 SRI는커녕 시장 자체를 지켜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안치용 / 발행인  drago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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