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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에는 애국심이 없다 (2)

 

참치에겐 친구가 있습니다. 돌고래입니다. 친구 사이라기보다는 참치가 “형!” 하며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사이라고 봐야겠지요. 참치의 돌고래 연모에는 사랑 외적인 사연이 존재합니다. (참치가 아는 한) 참치떼의 천적이 상어인데, 참치가 돌고래랑 같이 있으면 상어가 안 따라붙는다고 합니다. 덩치가 비등비등한 돌고래하고 상어는, 주먹세기가 비슷한 동네 건달 우두머리들이 서로 싸우지 않듯 상대를 피해준다고 합니다.

참치떼로서는 돌고래를 공짜로 보디가드 삼은 것이지요. 돌고래는 그러든가 말든가입니다. 하지만 그 대범함 때문에 돌고래에게 고통이 시작됩니다. 참치와 달리 고래 종류를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국제포경조약에 의해 설치된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어장(漁場)의 제한, 포획금지 등을 정하지만 완전히 금지된 것도 아니고 허용된 것도 아닌 상태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상업포경을 계속하고 있고, 일본은 연구용을 내세우며 실제로 상업목적 포경을 이어가고 있어 호주 뉴질랜드 등과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남획으로 고래 숫자가 줄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포경제한이 우세한 분위기입니다. 참치는 거의 모든 세계인이 먹지만 고래고기를 먹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처럼 식용으로 쓰지 않더라도 고래의 쓰임새가 없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포경제한으로 고래 개체수가 다시 늘어나게 되는 와중에 ‘참치잡이’라는 돌발변수가 튀어나옵니다.

참치잡이 배의 선장은 경험과 어군탐지기를 동원해 참치떼를 찾아 헤맵니다. 경험에는 물밖으로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돌고래의 경거망동이 포함되겠죠. 돌고래의 존재는 참치떼 존재확률을 높여줍니다. 어선이 참치떼를 잡는 과정에 돌고래는 참치떼 옆에 있다가 날벼락 격으로 그물에 걸려듭니다. 참치떼를 확신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어쩌다 돌고래들을 향해 그물을 던질 수도 있겠지요. 참치떼가 있으면 참치떼를 건진 다음에, 없으면 없는 대로 돌고래를 풀어주면 된다는 게 참치잡이 선단의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돌고래는 그물에 걸려 부상을 입거나 죽기도 합니다.

미국정치 용어로 미국 어선들이 돌고래들에게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입히게 됩니다. 복수를 주제로 한 같은 제목의 액션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람끼리의 문제라서 ‘부수적 피해’를 입는 이들이 사람이 됩니다. 가해자 입장에서 ‘부수적 피해’는 구조상 외부효과랑 비슷합니다. 원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생긴 거죠. (영화는 ‘부수적 피해’가 의도한 피해라는 측면에서 제목과 내용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라크에서 미군이 작전을 펼치던 중에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미국정부에서 “일부 부수적 피해가 있었다”고 설명해 세계적으로 비난을 산 적이 있습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이 재직시 한 말인데, ‘부수적 피해’라는 표현 자체에서 당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철학과 이라크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일 ‘부수적 피해’가 미국 민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어도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요.

이라크의 ‘부수적 피해’에는 눈감은 미국인들이 그에 앞선 멕스코만의 ‘부수적 피해’에는 결연하게 대처합니다.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미국 어린이들이라고 정정해야겠네요. 멕시코만에서 돌고래 피해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사회에 파문이 일어납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분노했습니다. 돌고래는 어린이들의 친구입니다. 돌고래는 또한 참치떼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돌고래는 물밖에 사는 어린 인간이나 같은 물 속에 사는 동생뻘 참치 모두에게 무심했습니다. 돌고래를 정점에 세운 우정의 특이한 삼각관계가 생겼습니다.

돌고래에 대한 참치떼의 추종은 돌고래를 위태롭게 했지만, 돌고래에 대한 어린이들의 관심은 돌고래에게 활로를 터주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마침내 참치떼로부터 돌고래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참치 불매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어떤 미국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엄마 나는 돌고래 죽이는 참치가 들어간 참치샌드위치따위는 안 먹을 거예요”라고 말했겠지요. 사소한 투정에서 출발한 참치불매가 전국적인 여론으로 형성되자 미국정부와 정치권이 나섭니다. 정치인치고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모두 유권자의 아들ㆍ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정치인의 ‘공식적인’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정치인의 사랑은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눈에 띄게 행동했을 때 뭔가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어린이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참치잡이에 새로운 규제가 가해진 것이지요. 미국 규제 당국은 어로과정에서 돌고래의 ‘부수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미국 참치잡이 어선들의 조업방식을 바꾸도록 조치했습니다. 규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집니다. 상식적으로도 어획방법 자체에 대한 규제와 연간 ‘(돌고래의) 부수적 피해’ 총량 규제밖에 없겠습니다.

미국 참치잡이 회사들은 이제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업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밖으로는 돌고래를 보호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중남미계 싼 노동력을 데려다놓고 고혈을 쥐어짰을지는 모르겠지만,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다른 조건이 같다면’ 새로이 한 가지 사회책임을 더 이행하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조금 더 지속가능한 사회로 한 걸음 대딛게 됐다고 판단할 수 있겠죠. 시점이 20여년 전(前)임을 감안하면 미국 참치잡이 회사들이 (강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앞서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경제적인 성과(버틈라인)뿐 아니라 생태계 보호 및 소비자 문제에 적극 대응해 결과적으로 트리플버틈라인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앞선 사례의 박윤리 사장과 비교해 볼까요. 미국 참치잡이 회사의 사장은 한국의 가상의 피혁공장 박윤리 사장과 달리 자발적으로 사회책임을 떠안지 않았다는 게 차이점입니다. 공통점은, ‘착한 기업’이 됐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윤리 사장의 피혁공장이 망한 것과 달리 미국 참치잡이 회사들은 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 공통적으로 규제가 도입됐기에 비용부담의 증가 및 조업환경의 악화라는 부담 또한 참치잡이 회사들에게 공통적이 됩니다. 새로운 규제의 수용강도가 회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박윤리 사장의 공장처럼 특정한 몇몇의 확고한 불이익으로 귀결하지는 않습니다. 전체의 불이익은 아무에게도 불이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런 예상은 한편으론 맞았고, 다른 한편으론 틀렸습니다. 특정한 몇몇 회사의 불이익으로 귀결하지 않았지만, 미국 참치잡이 업계 전체의 공통적 불이익이 됐기 때문입니다. ‘전체’라는 범위가 논란거리입니다.

문제는 바다 속에 국경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멕시코만의 참치는 잡히는 순간부터 미국산 참치, 멕시코산 참치가 되지 그전에는 그냥 ‘바다 산’ 참치입니다. 가두리양식이 아닌 한 아직까지는 물고기를 특정 영해에 묶어놓을 재간이 없습니다. 참치들이 이쪽 영해에서 저쪽 영해로 왔다갔다합니다. 잡히기 전까지 하루는 미국참치였다가 또 하루는 멕시코참치로 살아갑니다. 사정은 돌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멕시코만에는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듯 미국 어선 뿐 아니라 멕시코 어선도 조업합니다. 참치ㆍ돌고래와 달리 어선들은 바다 위 국경, 즉 영해의 범위를 준수합니다. 이제 바다 위와 바다 밑의 국경 불일치로 인해 어떤 문제가 야기되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안치용 / 발행인  drago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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