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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복지국가론자 피케티피케티를 읽는다

[앞의 글, <장하성의 피케티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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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럽보다 더 센 누진적 소득세를 도입 

   
 

 

그렇다면 피케티가 추구하는 사회적 국가 또는 복지국가의 방향은 무엇일까? 피케티는 현재 혹은 과거의 유럽국들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가차 없이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식 사회모델에 희망을 걸고 있다. 물론 이 점 역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한 이야기’다. 미국 사회와 달리 적어도 유럽 사회에는 의료, 교육, 연금 등 인간 생존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사회권)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피케티가 아니더라도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선진국들이 보여주었던 사회적 국가의 현대적 재분배는 교육, 의료 및 퇴직연금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조세제도와 사회적 지출이 직면하고 있는 한계와 도전이 무엇이든 간에, 이런 것들은 역사적인 면에서 거대한 일보를 내디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파적 갈등을 제외한다면, 이런 사회 제도의 바탕에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유럽에는 ‘유럽식 사회 모델’로 볼 수 있는 것들에 어떤 합의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589쪽. 진한 강조는 나)

 

언급했듯이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는 미국을 설립한 18세기 개척자들의 이상주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부의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심해지고 미국이 당시 불평등이 심했던 유럽을 닮아간다는 우려 속에서 미국인들은 20세기 초반에 유럽을 능가하는 고율의 누진세를 도입했던 것이다(605쪽) 

하지만 그로부터 20세기 후반 들어 앞장서서, 그간 규제되어온 자유주의의 고삐를 다시 풀어 놓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1979년 마가렛 대처,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함과 더불어 자유주의는 자본과 더불어 적나라한 모습을 다시 드러냈고, 궤변과 위선으로 가득 찬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의 책들이 경제의 바이블로 추앙받았다.

마침내 1990년대에는 금융의 세계화와 탈규제화가 진행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1920년대 전반기에 시작된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1980년대부터는 완전히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2007~2008년에 금융위기가 발생했지만 2010년대에 자본은 1913년 이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으로 번창했다(56쪽).

 

북유럽형 복지국가론자로서의 피케티 

피케티가 증명했듯이, 인류 역사상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작았던 시기는 2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와 그리고 전후의 ‘사회적 국가’ 즉 복지국가의 전성시대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논외로 한다면, 자본주의 시대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했던 시기는 양차 세계대전 시기와 전후의 30년이다.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파괴되고 이로 인해 총자본량이 감소해 불평등이 줄어든 현상 그 자체를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데, 따라서 우리는 불평등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특히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피케티가 사회적 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의 개입과 정책이 커다란 역할을 했던 1945년~1975년의 시기 말이다.

 

 

   

 

 

 

물론 피케티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다는 식으로 ‘위악적인’ 발언을 하고 있으므로 피케티가 보편적 복지국가에 무관심하다고 단정하면서 ‘안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은 사실 정반대의 것이며 그의 정책 대안은 분명하다. 누진적 소득세와 자본세의 도입을 통해, 여전히 문제는 많지만 그럼에도 가장 불평등이 완화된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21세기 자본』은 피케티의 모국인 프랑스, 그리고 서유럽과 미국, 영국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다양한 제도들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예를 들어 노동소득 불평등과 관련해 우리는 1970년~1980년대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가장 평등한 사회(그 이후 북유럽에서 불평등이 늘어나긴 했지만 이 국가들은 여전히 가장 덜 불평등하다)에서의 분배가 대략 다음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성인 인구 전체를 살펴보면 노동소득이 가장 높은 10%가 총노동소득(현실에서 이 소득은 본질적으로 임금이다)의 20%를 가져가고, 노동소득이 가장 낮은 50%가 총노동소득의 약 35%를 차지한다. 따라서 중간의 40%는 총노동소득의 45%를 얻는다(도표 참조). 이는 완전한 평등은 아니다. (…) 그러나 적어도 다른 국가나 다른 시대에 관찰되는 불평등과 비교하면 (…) 우리가 여기서 본 이정도의 불평등은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다.”(297~299쪽. 강조는 나.)

 

서로 다른 집단들이 총노동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

낮은 불평등

(스칸디나비아 1970~1980년대)

중간 정도의 불평등

(유럽 2010년)

높은 불평등

(미국 2010)

매우 높은 불평등(2030년?)

상위 10%(상류층)

20%

25%

35%

45%

상위 1%(지배층)

5%

7%

12%

17%

다음 9%(부유층)

15%

18%

23%

28%

중간 40%(중산층)

45%

45%

40%

35%

하위 50%(하류층)

35%

30%

25%

20%

해당되는 지니계수(종합적 불평등 지수)

0.19

0.26

0.36

0.46

 

『불평등 경제』에서도 피케티는 직접적인 임금상승이건 아니면 조세-재정적 재분배이건, 불평등을 교정할 필요성에 관해 역설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론자로 간주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서장」에서 단 한번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그의 책 전체의 흐름을 보면 그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단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공산주의 혁명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다. 유럽의 가장 발전한 국가들이 (그 국가의 국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회민주주의라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산업혁명이 거의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19쪽, 강조는 나.)

 

경제적 필연이 아닌 정치적 의지가 불평등을 바꾼다 

물론 피케티는 1945~1975에 유럽 등 선진국에서 나타났던 낙관적인 상황이 앞으로 손쉽게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중들과 정치인, 정책결정자들의 치열한 노력, 민주적인 토론과 합의, 그리고 결단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를 단순한 경제적 변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으로 설명할 피케티의 자본주의의 제2법칙에 따르면) 저성장 사회에서 불평등이 보다 급격하게 심화되지만,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위 완전경쟁 시장이 확보된다고 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적절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이를 관철시키는 사회적 국가의 개입이 없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완전경쟁 시장’도 불평등을 결코 완화시켜주지 않는다. 피케티가 국가의 정책과 다양한 행위자들의 집합적 선택, 즉 정치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어떤 경제적 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 없다. 191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불평등이 줄어든 것은 무엇보다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들이 불러온 결과다. 이와 비슷하게 1980년 이후 불평등이 다시 커진 것은 대체로 지난 수십 년간 나타난 정치적 변화, 특히 조세 및 금융과 관련한 변화에 따른 것이다. 불평등의 역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행위자들이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지에 대해 형성한 표상들, 이 행위자들 사이의 역학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집합적 선택들에 의존한다. 불평등의 역사는 관련되는 모든 행위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다.”(32쪽, 강조는 나)

 

“아무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라도 나는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그리고 공정한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한 가장 적절한 제도와 정책들에 관한 토론에 기여하는 데 관심이 있다. 더욱이 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의 지배 아래 정의가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45쪽, 강조는 나).

 

올바른 ‘정치’가 세계와 미래를 바꾼다 

피케티의 연구와 진단 및 예측을 둘러싼 논쟁이 무척 흥미로운 것은 불평등이 심화되리라는 피케티의 비관적인 예언(?)이 오류임이 드러날 때, 비로소 피케티를 둘러싼 논쟁은 끝을 볼 것이라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피케티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날은 예상컨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피케티가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논쟁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바로 그 순간이 피케티의 이론과 정책 대안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순간이기도 하다. 경제적 불평등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저하될 때에만 피케티의 주장이 오류(?)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21세기에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엄밀한 과학이 아니며, 행위자들의 집단적(정치적) 선택에 의해 미래의 방향은 바뀔 수 있다. 세계는 경제적 변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세계는 그것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정치적, 윤리적 결정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진정으로 균형 잡힌 탁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케티의 책을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예언으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피케티를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피케티처럼 상상력을 발휘해 피케티의 문자를 종종 넘어서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반해 장하성은 자신 스스로도 이러한 상상력이 부족했을 뿐더러, 독자들을 ‘무사유의 늪’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노력했다.

피케티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는 간단하다. 집단적 행위자들의 바람직한 (정치적) 결정에 따라 훌륭한 정책이 수립되면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불평등이 더 심화되리라는 피케티의 예측은 오히려 틀리면 좋은 것이고 반대로 틀리지 않는 것이 더 불행한 일이다. 피케티는 자신의 예언(?)이 오류로 판명되기를 기대하는 매우 특이한 이론을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홍준기 

이소연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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