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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의 피케티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앞의 글, (1)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주류 경제학은 왜 공황 장애에 빠졌나?>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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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기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 연구소 소장)

 

 

역사상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 1914~1975년 

좀더 상세히 논의는 뒤로 미루고 글의 흐름을 위해 여기에서 먼저 피케티 주장의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피케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불평등의 역사이다. 물론 피케티가 실증적으로 집중 조사한 역사 시기는 지난 300년간이며,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의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인류 역사 전체 대하여 이렇게 확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불평등했던 서양 사회에서 그나마 빈부격차가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19세기 후반부 혹은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기에서이다. 그 당시 노동운동의 영향으로 임금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노동자들의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절대적 불평등과 빈곤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했던 것이다.  

“엄청난 산업의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대중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하는 것만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전부라면 도대체 이 모든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17쪽)  

피케티에 따르면 19세기 말 경에 노동자 임금이 일정 정도 상승했지만 극단적 불평등이 여전히 서구 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구조적 불평등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상위 1%가 한 나라 부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극단적인 경제적 불평등이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두차례의 세계 대전의 충격으로 특히 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이 파괴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1914~1945년 기간에 세계 경제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들이 1950년대부터 소득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을 역사상 최저수준으로 낮춰놓았던 것이다(56쪽).  

피케티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1914년에서 1975년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이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두차례의 전쟁과 그것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들이 불러온 결과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선진국들은 고율의 누진세 정책을 채택했으며, 또한 전후 시기의 이례적인 경제성장의 결과로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피케티의 이러한 논제는 1945년부터 1975년까지의 시기에 사회적 국가 혹은 복지국가 체제가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상당히 잘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미국은 북유럽이나 서유럽적 의미의 보편적 복지국가체제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1919년부터~1922년 사이에 70% 이상의 고율의 소득세 세율을 처음으로 시도한 나라가 유럽이 아닌 미국이었다는 사실(604쪽)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미국을 강타한 후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미국 인구의 4분의 1이 실업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와 금융엘리트들이 국가를 파탄으로 이끌면서 자신들의 배만 불린다고 비판했다. 주로 주식에서 얻는 자본이득으로 1920년대 후반부에 미국의 국민소득에서 최상위 계층이 차지하는 몫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1933년 소득세 최고세율을 63%로 그리고 1937년에는 79%로 인상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42년에는 88%로, 그리고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4년에는 각종 부가적 세율 인상으로 인해 최고 부유층이 감당해야 하는 소득세 최고세율이 다시 94%까지 치솟았다. 1932~1980년을 통틀어 미국의 연방 소득세 최고 세율은 평균 81%였다(606쪽). 상속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의 상속세 최고 세율은 70~80%였다(606~607쪽).  

하지만 이렇게 장기간 고율의 누진세 세제를 실시했음에도 현재 미국이 선진국 중 가장 “빈약한 사회적 국가”(614쪽),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로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미국은 그 건국 이념인 자유주의 사상의 경제이론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한계로 인해 교육과 의료, 주거, 연금 등 복지 정책과 관련해 시민들에게 사회적 권리(사회권)를 보장해주는 보편적 복지 체제를 제도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어느 서구 나라보다도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선호를 가진 영미권 국가들이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는 유럽 국가들보다 더 고율의 누진세 세금 정책을 채택했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틀 속에서 가능한가? 피케티에 따르면 20세기 초 미국인들은 개척자들의 이상주의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미국 내에서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사회는 자유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고율의 누진세를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진적인 과세는 언제나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과 사적 재산을 인정하면서도 사적인 유인이 잠재적으로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정되지만 언제나 민주적 토론에서 충분히 토론된 원칙에 기초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따라서 누진세는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 이뤄진 이상적인 타협을 나타낸다.”(604쪽. 강조는 나).  

이 인용문에서 피케티는 이 시기의 미국 사회가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유럽 사회는 보다 직접적으로 혼합 경제의 길을 모색했다.  

“반면 유럽 대륙의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은 제2차 대전 이후 기업의 국유화와 경영진 보수의 직접적 제한 등과 같은 (미국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단들은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결정되었는데 어떤 점에서는 누진세를 대체하는 역할을 했다.”(605쪽.)  

유럽에서 소득세 최고세율이 오히려 미국보다 낮았던 이유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유럽 국가들이 미국과는 다른 방식의 경제 및 복지국가 체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허구성: 장하성 비판 

이렇듯, 자유라는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자유주의에 내재해 있는 어떤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 바로 그것이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을 저술한 이유다. 정확히 바로 이 점에서 피케티는 예를 들면 경제개혁연대의 장하성과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와는 철저하게 구분된다. 장하성은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칭하며 진보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의 경제사상은 ‘무늬만 진보일 뿐’ 사실상 보수주의자와 매우 닮아 있다.  

장하성은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가 제시하는 여러 정책적 제안을 깊게 고려할 가치도 없는, 즉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하는 보수적인 자유주의 태도를 보인다. 장하성은 우선 피케티가 제안하는 소득세 최고세율 80%에 반대하는데 그 반대의 이유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소득불평등의 완화를 위해 누진세를 강화하자는 피케티의 주장이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이다. 이러한 말을 하면서 장하성은 50%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제안한다(장하성, 『한국 자본주의』, 563~564쪽).  

장하성의 이런 논리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논리’이다. 사실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경제학에 특별히 새로운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사실 새로운 것이 없는 분야가 비단 경제학 분야뿐이겠는가). 그런데 장하성은 최고 소득세율을 강화해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피케티의 논리가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다시 한 번’ 말한다. 장하성이 이러한 소피스트적 논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여느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피케티를, 그리고 그가 던지는 메시지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장하성과 반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피케티가 최고 소득세율 80%을 제안한 것 자체가 그의 새로운 점이라고 말이다(물론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피케티는 자신의 제안의 근거를 미국과 유럽의 소득세의 역사에서 찾았으니 말이다!)  

물론 피케티가 최고세율을 당장 80%로 올려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사회적 합의와 민주적 토론을 거쳐 언젠가 달성해야 할, ‘사회적 국가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류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표현한다면 ‘장기적’ 목표 말이다.  

실제로 피케티가 말하는 80%의 최고소득세율은 터무니없는 제안이 아니다. 피케티가 길게 언급했듯이 실제로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서구 선진국들이 그것을 실행했었다. 그리고 서구의 경우, 그 때가 바로 인류 역사상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낮았던 시기였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피케티는 불평등의 근본적인 완화가 단기간에 불가능하다면 국가는 의료, 교육, 노후연금과 관련해 우선적으로 사회적 투자(복지지출)를 늘려야 할 것을 권하고 있다. 피케티의 ‘현실주의적’ 측면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장하성은 피케티의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를 조롱하면서 최고세율 50%를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진보적인 경제학자인 양 행세한다. 그렇다면 왜 50%인가? 75% 혹은 70% 정도로 좀 올려서 말하면 안 되는가? 자신 스스로도 합리적 이유를 댈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왜 굳이 50%로 ‘팍 깎은 후’ 자신 있게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하성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우리가 그동안의 한국 역사에서 보아왔던 너무나 진부한, 새로울 것도 없는 ‘자유주의적’ 태도 아니겠는가?  

장하성의 진보적 자유주의에는 아직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진부한 보수주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현재의 우리보다 훨씬 낮을 때에 이미 모범적인 복지국가가 되었다. 장하성은 마치 자신이 한국의 경제현실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정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세는 세수 증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장하성은 자신이 특히 비판하고 싶은 것은 피케티가 옹호하는 자본세라고 말한다. 고율의 누진소득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그는 특히 자본세가 문제라는 식으로 돌려 말하고 있다. 장하성은 “자본세로 정부 수입을 늘려 재분배하기보다는 적극적 노동정책이나 임금정책이 더 시급하다”고 그는 피케티를 비판한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이유는 (…) 임금으로의 분배 몫을 줄여온 기업 행태의 문제와, 그리고 임금도 낮고 고용도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영업 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노동 구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같은 책, 568쪽)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런데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세와 관련해서도 장하성은 몇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장하성은 피케티가 제안하는 글로벌 자본세를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이라고 단칼에 거부한다. 그런데 사실 피케티 역시 그 제안이 당장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를 제안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이상과 닮은 제도가 실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대안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준거점이 될 수 있다.”(피케티, 618쪽. 강조는 나.)

 

장하성은 피케티 제안의 이런 진보적인 면모를 숨기면서 마치 자신만이 현실을 잘 아는 경제학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애쓴다. 그리하여 장하성은 피케티가 제안하는 1~2%의 자본세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0.1~1% 정도가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피케티는 “0.1% 정도의 자본세는 실제 세금이라기보다는 의무 신고제도에 가깝다”(623쪽)는 견해를 이미 피력한 바 있다.  

이런 저런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장하성의 책을 읽어보면 자본세를 최소화하려는 진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걷지 말자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꼭 같은 말을 하는 우리의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성장 속도에 비해 자본수익률이 너무 낮을 경우에 자본세를 부과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먼저 상정할 수 있는 것은 투자율이 낮아지는 것으로 일정의 ‘자본 파업’이다.”(장하성, 567쪽) 

둘째,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하성은 우리나라에서의 불평등의 근본원인은 임금으로의 분배 몫을 줄여온 기업 행태의 문제와, 임금도 낮고 고용도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영업 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노동시장 구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려면 초과 내부유보세를 도입하고, 정규직으로의 전환제를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하성의 이러한 주장에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피케티가 틀렸다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아마도 피케티 역시 장하성이 제시하는 대안을 원천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케티와 장하성이 다른 점은, 피케티는 직접적인 임금 소득 상승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할 때 국가재정을 통한 소득재분배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불평등 경제』, 68쪽).  

첫째, 정책적 측면에서 말하면, 피케티 역시 장하성처럼 직접적인 임금투쟁이나 정규직 전환이라는 전략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장하성은 마치 피케티가 그런 전략을 배제하고 오로지 조세전략만 말하고 있는 양 피케티를 잘못 비판하고 있다. 피케티는 직접적 소득의 재분배(임금 인상 등)와, 세제 개혁을 통한 재정적 재분배 정책을 유기적으로 활용할 것을 권한다. 그런데도 장하성은 마치 이 두 개의 전략이 상반되는 것처럼 서술하면서 피케티를 왜곡한다.  

장하성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임금상승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 노동자는 아무 할 일 없이 마냥 기다려야만 한다. 반면 피케티는 이 경우라면 부자증세 등 세제 개혁을 통한 국가재정 재분배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여느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장하성도 ‘경제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피케티 책의 일부만 읽고 성급하게 비판하는 비학문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강력한 소득세 누진세율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하성은 입버릇처럼 복지를 이야기하지만 그는 기껏해야 빈약한 미국식 복지, 즉 자유주의적인 시혜적 복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이론적 측면에서 보다라도 장하성은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세가 증세를 통한 국가재정 확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본세는 현대의 사회적 국가가 의존하는 다른 세원을 적당히 보충해주는 정도 이상은 아[니다].”(620쪽). 장하성은 “자본세로 정부 수입을 늘려서 재분배하기보다는....”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장하성이 피케티의 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적인 예다. 피케티에 따르면 글로벌 자본세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를 규제함으로써 국가 내, 그리고 국가 간의 불평등을 완화하며, 조세 도피처를 통한 탈세를 막으려는 목적을 갖는다.  

“자본세의 주요목적은 사회적 국가의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금융 및 은행 제도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금융과 은행 시스템에 효과적인 규제를 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적 투명성과 금융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즉 누가 전 세계에 어떠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져야 한다.”(621쪽. 강조는 나.)  

셋째, 언급했듯이 장하성은 글로벌 자본세 부과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피케티도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완벽히 실현되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피케티는 바하마군도 등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가 실제로 최근의 미국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한다. 미국에서는 그것이 해외금융계좌 신고법(FATCA: Foreign Account Tax Compliance Act)으로 2010년에 채택되었으며 2014년과 2015에 단계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라고 한다(626쪽). 

한편, 이 점과 관련하여 피케티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전형적 논리를 다시 한 번 꼬집고 지나간다. 금융정보의 투명화가 이루어지면 각국 정부가 그 정보를 남용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우려 말이다. 하지만 피케티에 따르면 이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는 장하성과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와는 달리 이렇게 말한다.  

“조세피난처 나라들이 은행 비밀주의를 지키려 드는 이유는 고객이 납세 의무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조세피난처가 그들의 이익을 공유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는 시장경제 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의 세율을 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또한 개개인이 자유무역과 경제통합으로 더욱 부유해지면서 단지 이웃을 희생시킨 대가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둑질이다.”(625~626쪽.) 

장하성은 피케티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학문적 사대주의”라고 그럴듯하게 조롱하지만, 만약 피케티 같은 서구 학문이라면, ‘한국형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보다는 차라리 ‘학문적 사대주의’ 쪽에 나의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지금까지 장하성이 어떤 방식으로 피케티를 오독, 왜곡하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피케티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진보적 자유주의자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다음의 글 (3) <피케티가 그리는 복지국가의 미래>로 이어집니다. 

 

홍준기

이소연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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