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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왜 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황 장애에 빠졌는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1) :

왜 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황 장애에 빠졌는가?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글을 시작하며 

나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로 『21세기 자본』을 저술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소개와 해설의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경제학자들의 글은 자주 경제학도들만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언어나 수식, 개념으로 채워져 있어 비경제학도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부전공했으며 그 후 사회철학,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경제학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서 나는 알기 쉬운 개념과 용어 설명을 통해 피케티 이론에 대해 소개, 해설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경제학자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학문적 진단과 정책적 실천적 대안을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책이다. 또한 그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나와야 할 좋은 경제책, 즉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경제학 저작들의 진정한 출발점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 대략 다음 순서로 나의 글을 포스팅할 계획이다(세부 항목은 변경될 수 있음).

 

(1) 서론: 왜 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황장애에 빠졌는가?

(2) 피케티 이론의 개요

(3) 자본주의의 전반적 법칙 r > g

(4) 자본주의의 제1법칙, α = r × β, 자본주의의 제2법칙 β = s/g

(5) 피케티 이론을 둘러싼 찬반 논쟁 : 대체 탄력성 논쟁

(6) 결론: 윤리와 경제학 : 사회적 국가 혹은 복지국가의 필요성

 

 

주류 경제학자들의 피케티에 대한 반응: 공황 장애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영어로 출간된 이후 피케티 이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피케티의 그 저서가 나온 이후 그의 이론과 통계자료 해석에 대한 주류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있었고, 또 그 비판에 대해 피케티 자신은 물론 그에게 동조하는 경제학자들의 반비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 중 하나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피케티를 둘러싼 주류 경제학자들의 반응을 ‘피케티 패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마르크스도 케인즈도 모두 ‘물리치는 데’ 성공한 주류 경제학자들이 ‘공황장애’에 빠진 이유는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피케티라는 괴물을 잠재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패닉은 『파이낸셜 타임즈』에서의 ‘데이터 조작 파문’으로 그 병리적 증상을 드러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의 유력 경제 일간지인 『파이낸셜타임즈』의 경제 편집장 크리스 자일스(Chris Giles)는 피케티가 통계 수치를 조작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자일즈는 영국의 상위 10%가 차지하는 부의 비중은 피케티가 주장하듯이 71%가 아니라 실제로는 44%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부의 집중은 피케티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통계의 처리 과정에서 수치를 조작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주장인데, 하지만 피케티 자신과 그 밖의 논자들이 재반론을 통해 오히려 자일스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통계 수치를 왜곡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논쟁은 일종의 코미디처럼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왜 주류 경제학자들은 심리적 ‘공황장애’에 빠진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발설해서는 안 될 금기’로 간주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피케티는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 예를 들면 방금 언급한 폴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Stiglitz)와 같은 논자들도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자 심지어 (신)자유주의 경제이론과 정책을 기조로 삼고 있는 IMF에서조차 극심한 불평등은 경제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경제적 불평등을 말하던 진보적 경제학자들, 그리고 최근 그것에 대해 마지못해 겨우 이야기하기 시작한 일부 주류 경제학자들과 피케티의 진정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피케티는 불평등의 현실을 알리는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책에서도 이들과 다르다. 그는 불평등의 현실을 ‘소일거리용 잡담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진정한 문제’로 학계와 대중들 앞에 드러냈다그는 철저하게 주류 경제학자들의 언어와 연구방식을 활용하면서 주류 경제학자들을 넘어섰으며, 무엇보다도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명확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다. 이 점에서 피케티는 ‘진정한’ 진보적인 경제학자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는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케티는 고율의 누진적 소득세, 그리고 자본세를 (다시) 도입해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실행하지 않으면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 그리고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21세기에 더욱 극심해지리라고 진단, 예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진단과 예언은, 1970년 이후 지금까지 불평등이 심화된 까닭은 각 국가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세금 세율을 인하해 왔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케티는 십 수 년 간에 걸쳐 소득 불평등에 관한 통계적, 실증적 연구를 수행해왔다.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사실상 금기시되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충분히 주류 경제학자 혹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심리적 공황장애의 원인이 될 만하다. 물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불평등을 이야기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는 ‘구색 맞추기용’, 혹은 ‘언론 매체용’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피케티와 같은 이론적 정직함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계 경제는 ‘다소간 문제는 있지만’ 여전히 ‘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피케티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위선과 자기기만, 허위의식에 진정한 충격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공황장애의 주요 원인으로 남을 것이다.

 

피케티의 대안 : 사회적 국가 또는 복지국가  

피케티가 제시하는 정책적 대안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복지국가일 것이다. 물론 피케티는 복지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피케티가 복지국가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다음 사실이다. 즉 피케티는 국가가 고율의 자본세와 누진적 소득세 부과를 통해 효과적인 재분배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1945년~1975년 시기의 선진국이 역사적으로 가장 평등한 사회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책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 특히 북유럽 사회가 그 시기뿐만 아니라 여전히 지금도 가장 평등한 사회라는 직접 간접적으로 종종 언급하고 있다. 물론 북유럽 사회도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어떤 독자들은 피케티의 책을 읽으면서 북유럽 사회도 별 수 없이 불평등한 사회다 라는 비관적인 내용만을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피케티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는 여전히 북유럽 국가들이 그래도 불평등의 정도가 가장 낮은 나라라는 것을 잊지 않고 종종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 존재한다면 그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차선책이 아니라 불평등의 완전한 해소, 즉 유토피아적 상태를 원했다면 그는 마르크스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주창했을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나는 또한 공산주의 독재의 붕괴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서 성년이 되었고 그런 체제나 소련에 대해 애정이나 향수를 털끝만큼도 느낀 적이 없는 세대에 속한다. 나는 반(反)자본주의의 관례적인 그러나 게으른 수사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만큼의 예방접종은 받았다. (…) 나는 불평등이나 자본주의 자체를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더구나 불평등이나 자본주의 자체를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더구나 사회적 불평등은 그것이 정당화되기만 한다면, 다시 말해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차별이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두는’ 한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45쪽) 

반대로 보수주의 경제학자 혹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피케티가 ‘경제적 불평등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고 성토한다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같은 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정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수학과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경제학: 경제학에서 다시 정치경제학으로 

피케티의 책은 경제학 전반에 걸친 매우 광범위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갖는 무수한 장점 중 하나가 독자들이 경제학의 전문용어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 책을 읽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경제학의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깊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려운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피케티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어려운 수학을 사용함으로써 경제학,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현실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와 접근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말로 쉽게 설명하면 간단한 것을 수학자들은 마치 대단한 무엇이 어려운 수식 속에 있는 것인 양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수학 모델들, 즉 수식을 사용한 복잡해 보이는 모델도 알고 보면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고 피케티는 꼬집는다.  

​「서장」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경제학자로서 피케티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여과 없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의 궁극적 관심사는 ‘분배 문제’를 경제학의 중심문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피케티는 경제학자들이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사소한 수학적 문제들”에 매달리고 있음을 「서장」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경제 모델을 고안하고 이 모델의 범위 내에서 현실을 설명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전형적인 경제적 작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모델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특정한 가정을 설정해야 하는데, 이미 이 가정 자체가 현실과 유리된 제한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후생 경제학(복지경제학, welfare economics)에서 최고의 명제로 내세우는 ‘파레토 최적’이라는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피케티도 파레토 최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후생 경제학의 주춧돌인 파레토 최적 개념에 대한 피케티의 비판 

파레토 최적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에게 이득이 되도록 자원 혹은 부의 배분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주류 신고전파 복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파레토 최적 상태를 복지 경제학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상태로 간주한다. 파레토 최적이 이루어진 상태가 과연 분배가 제대로 구현된 상태인가?  

​무엇보다도 파레토 효율성 이론은 최초의 분배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근본적 한계를 갖는다. 이미 처음에 부가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파레토 최적 이론에 따르면, 이 분배 상태를 바꾸기 위해 상위 1%의 효용을 감소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효율적인 분배가 아니다피케티가 종종 완전경쟁 시장도 경제적 불평등을 결코 완화시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파레토 최적 상태가 진정으로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이미 처음에 부나 자원이 공정하게 분배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경쟁이란 이미 무의미한 개념이 되는 것이다. 

​피케티에 따르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파레토의 이론을 채택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들이 파레토의 명성을 이용하려 한 것이겠지만 파레토가 죽기 직전에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집권을 지지한 것도 사실이다. 파레토가 자신의 이론을 위해 이용한 경제적 자료들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파레토는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했다(439쪽). 

​놀라운 것은 후생 경제학이라는 용어이다. 후생 경제학은 영어로는 ‘welfare economics’이므로 복지 경제학이라고 번역되는 편이 더 정확한 경제학의 중요한 한 분야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분야인 복지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이 갖고 있는 목표는 파레토 최적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부유한 사람들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즉 부의 재분배를 가능한 한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레토 최적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복지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차리라 반(反)복지 경제학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 더 솔직해 보인다. 

피케티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바로 주류 경제학자들의 바로 그러한 태도이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과학성이라는 미명하게 수학적 놀이만을 일삼는, 납득할 수 없는 태도를 고집하는 기만적인 주류 경제학에 대해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경제학 분야는 아직도 역사적 연구 및 다른 사회과학과의 협력을 등한시 하면서 수학에 대한, 그리고 순전히 이론적이고 흔히 이념적인 고찰에 대한 유치한 열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너무나 자주 자기들만 관심을 갖는 사소한 수학적 문제들에 대해 매달리고 있다. 이처럼 수학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던지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필요가 없이 과학성의 거래를 손쉽게 입힐 수 있는 방법이다.”(46쪽) 

‘수학을 잘 하면 머리가 뛰어나다’라는 편견을 이용해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과학을 하고 있는 양 사람들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현실과 무관한 경제 모델을 만들고 자기네들끼리 그 모델이 현실 설명력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식의 무익한 논쟁을 하면서 마치 경제학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과학인 양 행세를 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변수만을 고려하는 이러한 연구 방법론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다. 바슐라르, 카바이유 같은 과학철학자의 이론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부와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학은 물론 높은 소득과 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피케티는 비현실적인 ‘사소한 수학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경제학’이라는 말보다 ‘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정치경제학자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을 집필한 궁극 목표는 경제적 불평등의 역사와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국가, 즉 복지국가라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자유주의자도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도 아닌 피케티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 혁명이나 자유경쟁 시장이 아니라 누진적 소득세와 자본세를 통한 재분배 정책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피케티가 파레토 효율성 개념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완전경쟁 시장도 경제적 불평등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종종 언급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계속]​

 

홍준기 

이소연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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