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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사회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하여

사회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미디어리퍼블릭에 게재되는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는 그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롭게 토론하고자 하는 의도의 일환이다. 특정 필자의 글이 사회민주주의를 보는 시각 전체 의견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 편집자 주

 



"나는 소신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다"

사회민주주의 스펙트럼 안에서도 크게 오른쪽형과 왼쪽형으로 나눈다면 나의 포지션은 <왼쪽형으로 가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따라서 필자가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는 현실 자본주의에서 출발하여 보다 이상적 도착지인 사회주의에 안착하기까지 민주주의적으로 실현해나가려는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에 가깝다. 물론 나와 다른 사민주의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민주의를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인 사회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념 노선으로 본다면 필자가 추구하는 바는 이 정의에 영락없이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셰리 버먼(Sheri Berman) 역시 언급했던 “사회민주주의란, 국가와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 위에서 탄생한 적극적인 민주주의자들의 비전”이라는 점 역시 받아들인다. 아주 단순하게만 말한다면 사민주의란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이념 노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는 1951년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선언문으로도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1959년 독일 사민당이 채택한 <고데스베르크 강령> 역시 사회민주주의의 성격과 방향을 말해주는 중요한 내용으로,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절연하면서 사회주의 실현은 정해진 방식이 있는 게 아니라고 보며 <민주적 사회주의>demokratische Sozialismus를 추구하고 있다. 참고로 <고데스베르크 강령>은 앞서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심지어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되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SI 1951)라는 같은 문장까지 강령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나의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참고로 필자의 사민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주의(이 점에서 내겐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 거의 같은 말이다)는 생산수단의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소유와 경영 그리고 상이한 사회적 목적을 위한 자원의 배분과 사용이 자유로운 시민사회권력의 행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구조를 뜻한다. 물론 좀 더 깊숙한 논의들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크게는 다음의 3가지라고 여겨진다.

   
▲ 사진 : 사회민주주의 상징인 '붉은장미'

1. 사민주의의 <계급타협>을 단선적으로만 이해하는 점.
2. 국가행정 및 정당 정치를 통해서만 도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점.
3. 복지자본주의만을 사민주의 최종 목적지로 오인하는 점.

사민주의에 대한 오해 중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이미 타협한 체제가 아니냐 하는 시선이 있다. 핵심은 이 <계급타협>에 대한 해석에 달려있다. 나 자신이 이를 오해라고 말하는 이유는 타협이라는 것 안에도 몇 가지 다양한 선택지들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타협을 마치 자본주의에 대한 백기투항식으로만 해석해버리는 단정적이고 단선적인 견해 때문이다.

하지만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Right)조차도 계급타협은 환상이나 교착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노동계급의 몫을 얻어낼 수 있는 실질적 쟁취들이 있을 만큼 다양한 전략적 성과의 포지션들 역시 분명하게 포함될 수 있음을 거론하고 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공생적 변혁 모델의 노선이 될 수 있음을 말하며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과는 달리 국가 자체를 투쟁의 장(場)으로 설정하고 있음도 언급한다.

그렇다면 정말 현실에선 그러하냐고 했을 때 스웨덴이 현재로선 여전히 <복지자본주의> 국가로 머물고 있긴 하나 그래도 현존하는 국가들 중 실제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조리를 그나마 가장 완화하며 살고 있는 안정적인 나라들 중의 하나로도 손꼽고 있는 점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여전히 UN을 비롯한 각종 연구조사에서도 행복한 삶 그리고 노후 안정 지표를 조사하면 많은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복지 자본주의 국가를 현재로선 1층으로 볼 것인지 2층으로 볼 것인지 3층으로 볼 것인지는 여전히 해석여하에도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론 분석으로 유명한 에스핑 앤더슨(Esping Anderson)이나 스웨덴 현황 분석에도 정통한 신정완 교수는 결국 복지국가 역시 <복지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사회주의>로까지 이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필자 역시 그러한 입장을 추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민주사회주의란 공산주의와 달리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로서의 사회주의라고 보면 될 것이며, 이점은 이미 사회주의 용법들 중의 하나로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대략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참조바람).

" 사민주의를 정당 정치를 통한 의회주의로서만 실현해가는 입장으로 보는 건,
사민주의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또한 사민주의를 마치 정당 정치를 통한 의회주의로서만 실현해가는 입장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러한 점도 있겠지만 이는 사민주의를 너무 좁게만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민주의의 전략은 의회 안에든 의회 밖에서든 전방위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사회주의를 추구한다. 그저 의회주의 통로에만 기대어 정당의 집권을 통해 마련되는 사회주의 실현 방식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미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이며, 이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인임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설령 의도하는 특정 정당이 집권하지 못하더라도 가능하면 시민사회의 사회권력에 의해 민주적으로 견제되고 유지되어지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일종의 <시민사회주의>를 추구하려는 입장에 가깝다. 이는 의회 안이든 의회 밖이든 다함께 다양한 공생적 삶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인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이념에는 지배권력자가 아닌 피지배자인 민(民)의 주인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일종의 약자우선성의 원리마저도 함께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로서는 국가의 장(場)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기에 이는 필연적으로 <투명한 국가>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내가 아는 사회민주주의는 <민(民)에 의한 투명한 국가>를 지향한다. <투명한 국가>에 대해서는 국내 『사회민주주의 선언』(정승일ㆍ조원희 지음)에도 다음과 같이 잘 설명되어 있다.

<투명한 국가>란 국가의 모든 행위와 활동에 관한 정보를 비밀 없이 공개하는 국가, 그리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국정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언제든지 국정을 감시·비판하고 견제·통제하도록 권장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투명한 국가는, 모든 선진국에서 그러하듯이,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시장원리’ 강화가 아니라, 오로지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개입이 강화될수록, 그 국가개입의 목표와 효과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 통제가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국가개입을 강조할 때 그냥 국가개입이라고 하지 않고 민주공화주의적 개입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강한 국가개입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나라들에서 정치권력과 유착된 반칙과 특권,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것은 이렇듯 국가 투명성과 다차원적으로 전개되는 민주주의 덕택이며, 따라서 그 국가들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내용적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고차적 복지국가, 고차적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밑줄은 필자의 표시).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를 형성할 것도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다(여기에 나는 <추첨 민주주의>까지 더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도 여전히 진화과정에 놓여 있기에 언젠가 보다 더 적절하고 더 나은 이념 노선이 있다면 마땅히 나는 그곳으로 다시 나아갈 것임도 말씀드린다. 여기에는 코뮌주의도 있고 아나키즘도 있고 얼마든지 여러 급진적 이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보다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좀 더 설득력 있는 현실적인 이념 노선의 입장이라고 여긴다.

사민주의자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의 말대로 현재의 내 입장은, 너무 멀리 있는 유토피아보다는 그보다는 좀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바라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나키즘은 나에겐 1층이 아닌 (1층, 2층이 지어진 다음 단계로서 가능한)3층쯤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미선

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몸학연구소(freeview.org)를 운영중이다. 역서로 화이트헤드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2003), 저서로는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4)와 <기독교 대전환: 낡은 기독교에서 새로운 기독교로>(2012)가 있다.

이소연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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