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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 (3)사회민주주의의 가치관

<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 (2)>에 이어서

수정주의와 개량주의, 공동체와 개인

사회민주주의란 사회주의를 실천의 방식과 관련하여 재해석한 것이되, 기본 이론이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른 사회민주주의의 다양성은 그 정치적 기획의 속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정통과 이단, 즉 수정주의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계급이 없고 소외가 없으며 개인이 자아를 자유롭게 실현하면서도 개인의 자아실현이 사회의 이익, 사회의 번영과 모순하지 않는 사회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11) 사회민주주의의 꿈과 이상(理想)은 사회주의의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목표에서 일치하므로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수정주의가 아니다. 궁극적인 지향점에서 보자면 양자 모두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회민주주의는 그 목표를 당장 완전한 형태로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을 인정하면서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통해 반대 세력과의 대결과 절충, 타협 등 다양한 전략을 그때그때 구사하면서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개혁하고자 노력한다. 목표에 한발 한발 다가서려는 개량적이고 점진주의적인 정치기획인 것이다.(12)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데 여러 길이 있듯이 이러한 민주주의적 과정은 다양한 진보의 길로 나타난다. 또한 궁극적 목표에서 일치하는 한 그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도 포용한다. 예컨대 사회민주주의 정당에는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참여하는데 어떤 장애도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단번에 모든 것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심지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혁명주의적 정치기획’은 종말론적인 종교적 경향의 세속적 버전이며 천년왕국적인 꿈에 사로잡혀 당장의 실천을 오로지 그것을 위한 준비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을 갖는 정당은 당장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적 대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위한 의지도 없으므로 구체적인 정책 역량이 형편없이 낮다. 이는 극단적인 생태주의와 레닌주의적 혁명 운동이 그러하며 또한 다양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혁명론도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NL과 PD 같은 한국의 진보 운동에도 이러한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목표와 수단을 분리하지 않으며 완전한 민주주의라는 목표는 동시에 그것을 실현시키는 핵심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 수십, 수백 년 뒤의 삶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 더욱 소중하다면 오늘의 개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성과를 미래를 향한 꿈과 이상(理想)에 비추어 반성하고 다시 한걸음 의미 있는 전진을 모색한다.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끈을 절대 놓지 않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쏠리지 않는 것이다. 당장의 삶에서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설령 장기적으로는 자신과 사회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위험이 있을지라도 당장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정치이념과 정치가에 몰려가기 마련이다. 1930년대에 나치즘과 파시즘이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전두환 개발독재가 그랬다. 

이처럼 긴 여정을 생각할 때 제한된 현실에서 당장의 삶이 유의미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장이 파괴한 공동체를 어떻게든 부분적으로라도 복원시켜야 한다. 계급간 경제적으로 부딪히는 이해관계만 해결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는 자본주의가 파괴한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이용해 ‘노동계급’ 사회주의 대신 ‘민족공동체’ 사회주의 즉 민족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를 획책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별 가족과 개별 개인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경제사회적 문제를 국가공동체와 협동조합 등 다양한 공동체적 차원에서 해결함으로써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민족국가와 협동조합 같은 다양한 차원의 공동체에 대해 결코 관심을 놓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던 좌파는 개인과 개성의 절대적 우위성을 신봉한 나머지, 가족과 민족 같은 공동체적 가치가 일반 국민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폄하한다. 사회민주주의 역시 보수 세력이 앞세우는 공동체 해체에 따른 문제들, 예컨에 흉악범죄와 가족해체, 자살 등의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13)

사회민주주의는 계급문제, 즉 현재 야기되는 사회 양극화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 문제에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한국의 자주파(NL)가 북한 편향적이고 극단적 반미와 함께 과도한 민족주의라고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있어 민족 문제와 남북 문제의 중요성 그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의 독자적인 민족 문제 해법과 남북 문제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1930년대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가 복지국가는 ‘인민의 가정’(people’s home)이라는 일견 가부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슬로건으로 당시의 히틀러 같은 보수반동적 가부장주의와 민족주의에 맞서 스웨덴 국민을 진보의 편으로 견인한 것은 우리가 좋은 사례로 참조할 만하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 (4)>에서 계속

글/조원희

국민대 경상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한국경제의 위기와 개혁과제>(공저·1997), <사회민주주의선언>(공저·2012) 등이 있다.

(8) 그런 까닭에 미국의 클린턴·오바마 민주당은 교육의 중요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면서, 마치 교육에 있 기회 평등이 이루어지면 소득 불평등도 사라질 것처럼 과장한다. 이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도 마찬가지였는데, 청소년의 교육기회의 평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함께 성인들의 소득 불평등을 야기하는 원인(이것은 결국 미국 민주당 및 영국 노동당이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금융, 기업 정책의 결과인데)에 대한 무관심이 제3의 길 노선의 특징이다.

(9) (고진, 2010)가족 내 분배의 원리는 공동분배와 증여가 여전히 압도적인 분배 원리인 까닭에 여기에 국가가 개입하여 예컨대 상속세율을 70~80%까지 끌어올리게 되면 경제사회적인 반발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연대의 원리가 충분히 구현되어 가족간 유대가 사회적 유대로 대체되는 수준에 비례하여 부의 대물림을 억제하는 조세구조가 서서히 강화되어야지, 급진적으로 상속, 증여세율을 연대의 원리 구현과 무관하게 높이는 일은 피해야 한다.

(10) 교육 기회에 있어 약간의 불평등이 추후 성인이 되었을 때 엄청난 소득 격차를 낳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교육보다는 경제구조와 노동시장의 문제이며 교육 정책이 아닌 경제정책에서 다룰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음악 교육받았다고 엄청난 소득을 얻는 것은 아닌데, 그에 반해 같은 동일한 대학 출신인데도 의대와 법대 출신이 상대적으로 고소득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고졸자와 대졸자간의 생애 소득에서도 격차가 크다. 이렇듯 노동시장에서의 학력차별이 심한 까닭에 모두가 대학을 가려고 한다. 그런데 만약 교육 기회의 평등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가 원하는 모든 청소년과 성인에게 대학입시를 평등하게 보장한다면, 모두가 쓸데없는 대학 교육을 받는 까닭에 심각한 자원배분 왜곡이 초래될 수 있다. 이렇듯, 사회민주주의의 여러 가치들은 무조건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연관된 제반 조건들을 개선하면서 점진적으로 그 가치의 수준을 높여 나가야 한다.

(11) 그런데 이 꿈은 세계적 차원에서만, 세계정부 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 근현대의 세계는 크고 작은 민족국가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종종 국가간 분쟁과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나라마다 발전 단계가 다르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는 더욱 그러하다. 나라 안에서도 계급 간 이해의 충돌이 불가피하지만 나라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은 더욱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의 일차적인 공간은 개별 국가이며 나라들 간의 국제적 관계는 이차적이다.

(12) “혁명의 필연성은 ‘지금 당장 여기서’가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이라는 장구한 역사적 전망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박호성, 2005, p.212).

(13) 셰리 버먼(2010)은 폴라니의 이론을 받아들여 20세기 중반 사회민주주의의 성공 비결을 (경제가 아닌) 정치의 우선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공동체주의에서 찾고 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에 착근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립하려 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과도하게 진행되면 사회로부터의 반발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M.샌델 역시 미국 민주당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공동체적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한 까닭에 레이건, 부시 같은 보수주의(보수적 공화주의)에 밀렸다고 보고 있다.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정치경제학에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것을 칭찬하는 세리 버먼의 견해는 옳지 않다. 물론 20세기 초반 제2 인터내셔널을 지배한 카우츠키와 힐퍼딩의 경제주의, 천박한 경제결정론(경제가 우선한다는 원칙)과 함께 당시의 사회민주당들이 오로지 노자간의 계급투쟁만을 중시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은 그 속성상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경시하게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사유재산, 시장 그리고 외부효과-시장과 비시장의 상호작용”(사회경제평론 37-1, 2011;http://jowh.tistory.com/39)이라는 논문에서 공동체의 문제 그리고 시장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문제를 정치경제학에 기초하여 자세히 논증하였으며, 이 문제를 진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내가 보여준 것은 비시장(공동체)은 폴라니가 생각하듯이 그냥 불변으로 존재하고 시장과 이런 저런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양자간의 역동적으로 변하는 상호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폴라니의 이론은 정치경제학의 대안이기는커녕 현실에 대한 피상적 관찰과 일반화에 불과하다.

<참고 문헌>

가리타니 고진(2010)  <세계사의 구>』, 조영일(역), 도서출판b, 2012.

박호성(2005)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 책세상.

셰리 버먼(2010) <정치가 우선한다>, 김유진역, ㈜후마니타스.

이근식(2011)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최태욱(편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폴리테이아.

조원희・정승일(2012) <사회민주주의 선언>, 홍진북스.

Wikipedia(2013) “Social Democracy”,  http://en.wikipedia.org/wiki/Social_democracy 

이소연 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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