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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2)사회민주주의 정치가 한국 정치의 대도약을 이끌 것

<21세기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1)>에 이어서

한반도의 특수 상황에서 기존 이념의 황폐화

현재 한반도의 상황은 세계무대에서 전개되는 기존 이념의 황폐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우선 북한 체제는 자위의 마지막 수단인 핵무기를 확보하여 ‘생존을 위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지켜야 할 가치,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가치를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고 체제의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절취부심하고 있다. 이것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혁명적 사회주의)가 한반도 차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공산주의가 경제사회적으로 경쟁력을 가졌다면, 즉 북한이 경제사회적으로 번영했더라면, 핵무기가 아닌 빈약한 재래식 무기만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북한이 지금과 같은 체제적 안보 위협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 즉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남북 간의 경제체제 경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남한의 자유주의는 기이할 정도로 왜곡되어 지금까지 지배해왔다. 한국판 자유주의는 반공 즉 자유의 부정 그 자체였다. 특히 유신독재 이후 1987년 민주화가 성공하기 전까지, 이 나라에서 정치적 자유는 완전히 질식당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체제는 온전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했다. 그 근본 이유는 한국의 경우 서구보다 산업화가 100년 늦다 보니 산업화 초기에 필수적인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즉 중상주의)을 형식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수행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에 서구가 거친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수행하려다 보니 이렇듯 국가가 경제를 이끌면서 동시에 정치적 자유도 억압하는 일이 발생했다.  

자유주의의 이중적이고 자가당착적인 모습은 1997년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나타났다. 이 시기에 정치적 민주화를 완성하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박정희식 중상주의 경제체제를 해체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금융위기의 원인 제거를 위해 진행된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은 IMF와 세계은행 등 글로벌 신자유주의 세력이 그 내용과 방향을 사실상 주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정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한국경제의 재편을 주도한 것이다! 진보를 내세운 민주 정부가 보수의 정신인 신자유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급진적 시장주의를 집행했다. 그 결과 일반 국민들은 민주주의=신자유주의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완전히 ‘뒤죽박죽’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 세력 내의 더욱 진보적인 일파는 구소련의 혁명적 사회주의노선(이른바 PD)을 추종하거나, 또는 그 노선의 개발도상국 변형인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 노선을 추종했다. 그런데 구소련 모델을 추종하던 PD 세력은 1990년대 들어 소련 및 동유럽의 몰락과 함께 급격히 쇠퇴했다. 그들은 그 이후 포스트모던 철학과 포스트-맑시즘의 수용을 통해 새롭게 서구적 신좌파의 일종으로 변모했는데, 하지만 서구 신좌파의 본질적 속성상 이들은 여전히 문화예술적, 철학적 좌파에 머무를 뿐 현실성 있는 경제사회적 대안을 제시하여 정치적으로 대중을 이끌어가는 일에서는 무능력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대중적인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른바 엔엘(NL)이다.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초기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우파가 민족국가 형성에 앞장선 서구와 달리, 우리처럼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들의 경우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과 완성에 좌파가 앞장서는 양상이 일정하게 불가피하다. 게다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간섭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쟁의 전쟁까지 치른 나라에서는 민족국가의 완성운동(통일운동)이 반제국주의 또는 반패권주의 성향을 띄면서 대중적 호응을 얻는 일이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통상의 경우라면, 즉 우리처럼 외세에 의한 식민지화와 분단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라면, 좌파적 민족주의는 민족해방 또는 통일 이후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소멸했을 것이다. 과거 계급문제와 민족문제 사이에서 혼선을 겪던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프러시아(우파적 민족주의)의 주도로 1871년 독일이 통일되자 그러한 이념적 혼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 남북분단 상황에서 여전히 남북 간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며 그 결과 여전히 사회주의(계급운동)와 민족주의(통일운동)가 분리되지 못한 채 결합되어 있다. 이렇듯 사회주의가 좌파적 민족주의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지 못한 점 또한 우리나라 진보의 이념 지형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또 하나의 특수한 요인이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서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기존 이념들은 그 역사적 생명을 다했으며 이제 완전히 새로이 혁신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있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21세기를 넘어, 새로운 역사적 시간으로서의 21세기를 열고자 한다면, 현재의 세계적, 한반도적 위기를 타개해 나갈 새로운 정신과 이념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정치적, 이념적 기획의 출발점

이념과 정치에서의 모방·학습과 추격, 혁신

서구에서 근대 이후 탄생한 모든 기존 이념들이 한반도에서도 -뒤죽박죽이기는 하지만- 적용되어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결과 현재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념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살펴보자면, 우선 자본주의적 산업화·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 즉,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과제가 우여곡절의 역사 속에서 어찌되었건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 둘째로, 온전한 민족국가의 완성(통일국가)의 과제는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북한의 지리멸렬한 행태를 보건데 당분간은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셋째, 오늘날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년간 한반도의 남쪽에서 수행된 신자유주의가 심각한 사회 분열과 양극화를 낳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늘날 계급 간 양극화와, 대-중소기업간 양극화, 정규직-비정규직간의 양극화와 과다부채에 짓눌린 서민가계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젊은 층의 ‘삼포세대’로의 전락과 저출산 성향, 노인들의 고령화와 빈곤층으로의 전락이 급진전되고 있다. 소속감과 위안의 거처였던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의해 파괴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혼과 자살, 흉악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삶의 현실과 이념 모두에서 황폐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이 황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은 무엇인가? 

후발 공업화를 수행한 한국 자본주의는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된 기존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즉 기존의 기술경로를 모방해 만든 제품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 기술과 자본이 축적한 단계이후에서는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혁신을 수행하는 탈추격(post catch-up) 모델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다. 

이념 지형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추격과 탈추격의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즉 먼저 서구에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수정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경쟁과 협력의 구도를 모방하여 그것을 우리의 정치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보수는 신자유주의 사조에, 그리고 진보마저도 신자유주의에 상당 부분 편승한 미국의 자유주의 또는 유럽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 사조에 올라타는 바람에,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상적 삶이 극심하게 황폐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파괴해버린 물질적, 정신적 삶을 치유하고 복구해 국민들의 삶의 안정과 희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서구에서 전후에 구축된 제3의 길 이전의 사회민주주의와 수정자유주의의 경쟁과 협력의 구도를 우리의 정치 현실, 이념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창조해낸 ‘복지국가’와 ‘조정된 시장 경제’의 경험과 이론에 대해 열심히 배우고 익혀 나가는 추격형 발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더 이상 신자유주의와 별로 다를 것 없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후 1970년대 이전까지 서구에서 융성한 수정 자유주의에 대해 열심히 배우고 익히면서 사회민주주의와의 경쟁과 협력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러한 추격형 발전을 통해 사상과 정신, 정치를 성숙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21세기의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세계사적 위기와 세계사적 과제, 그리고 한반도 및 남한의 독특한 상황에서 비롯된 과제를 고려하면서, 새로운 혁신과 탈추격의 길을 서서히 개척해 나가야 한다. 

산업화 및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가 후발국의 이점을 십분 활용했듯이, 이념과 정치의 선진화 과정에서도 우리는 선진국의 경험을 활용하고 그 시행착오를 피해가면서 우리에 맞는 창조적인 내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진보만 홀로 변신한다고 될 일은 아니고, 보수도 변신해서 양자가 정치 무대에서 수준 높은 새로운 차원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  

<21세기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3) > 에서 계속

 

글/조원희

국민대 경상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한국경제의 위기와 개혁과제>(공저·1997), <사회민주주의선언>(공저·2012) 등이 있다.

조원희  sdjournal.korea@gmail.com

이소연 기자  luxjin@s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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